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황제로 칭송받고 있는 당태종의 왼쪽 눈알이 빠진 난공불락의 요새 안시성이 어디인지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식민사학을 그대로 계승한 강단사학계는 이러한 안시성을 요녕성 요하 강변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는 우리의 역사강역을 엄청나게 축소·왜곡시키는 매국적인 반도사관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식민사학계의 반도사관이 잘못이라고 성토하는 재야사학의 일부는 ‘환단고기’ 기록에 개평(開平) 동북 70리에 있다는 안시성을 현 하북성 난하 서쪽 당산(唐山)시로 비정하고 있기도 한다. 이는 요수나 패수를 현재 난하로 보고 중국역사지도의 지명대로 해석한 것으로 이 역시 잘못된 이론이라 하겠다.
명나라는 영락제 때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하면서부터 지명이동을 통한 역사왜곡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요서군의 노룡현과 갈석산이 산서성 남단에서 현재 하북성 진황도로 옮겨지면서부터 본격화되어 황하 중류에 있던 유주가 북경 부근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당시 조선왕조는 명나라의 속국인지라 이러한 역사왜곡을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상국의 뜻을 받들어 ‘세종실록지리지’가 만들어져 역사적 승자였던 동이족 관련 지명들이 한반도로 옮겨져 반도사관이 만들어졌다. 세조·예종·성종 조에 이르러서는 우리의 위대했던 상고사를 기록한 민족사서들이 수거되어 감금되기에까지 이른다.
게다가 이렇게 감금된 고대사서들을 손에 쥐게 된 일제가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해 우리역사를 완전 말살하고 있을 때, 한족 주도의 민국 역시 동이족 관련 기록들을 지우고 본격적인 지명이동을 단행해 옛날부터 산해관 장성 서쪽은 중국 땅이라는 역사왜곡이 굳어져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열하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열하일기’의 안시성은 단동 봉황성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 박지원은 북경으로 청나라 황제를 알현하러 가는 길에 당시 안시성으로 알려져 있던 단동 근처의 봉황산성을 찾아가게 된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 가보고는 안시성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열하일기 1권 도강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점심을 들고 내원과 정진사와 함께 구경을 나섰다. 봉황산은 여기서 약 6~7리밖에 되지 않는다. 그 전면을 보니 더욱 기이하고 뾰족해 보인다. 산 속에는 안시성(安市城)의 옛 터가 있어서 성첩(城堞)이 지금껏 남아 있다 하나 그건 그릇된 말이다.
삼면이 모두 깎아지른듯하여 나는 새도 오를 수 없을 것 같고 오직 정남쪽의 한 면만이 좀 평편하나 주위가 수백 보에 지나지 않음을 보건데, 이런 탄알만한 작은 성에 그 때 대규모 오랫동안 주둔한 곳이 아닐 것이니 이는 아마 고구려 때에 조그마한 보루(堡壘)가 있었던 것 같다.”
당태종이 천하의 군사를 징발하여 이 하찮은 탄알만한 작은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회군했다는 것은 그 사실이 의심되는 바 없지 않다. 김부식은 다만 옛 글에 그의 성명이 전하지 않았음을 애석히 여겼을 뿐으로 그가 ‘삼국사기’를 지을 때에 중국의 사서에서 골라 베껴내어 모든 사실을 그대로 인정했다.
또 당나라 학자인 유공권의 소설을 인용하여 당태종이 부상당한 사실을 입증까지 했다. ‘당서’와 ‘자치통감’에 기록되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 그들이 중국의 수치를 피하기 위하여 꺼린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사실을 단 한마디도 감히 쓰지 못했으니 그러한 사실을 믿던 안 믿던 간에 다 생략하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을 잃었는지 아닌지는 상고할 길이 없으나 대체로 이 성을 안시라 비정함은 잘못이라고 본다. 당서에 보면 안시성은 평양에서 5백리 거리요 봉황성 또한 왕검성(王儉城)이라 했다.
지리지에는 봉황성을 평양이라 한다 했으니 이는 무엇으로 그리 명명했는지 모르겠다. 또 지리지에 옛날 안시성은 개평현(蓋平縣) 동북 70리에 있다 하였으니, 대체 개평현에서 동으로 수암하(秀巖河)까지가 3백리이고 수암하에서 다시 동으로 2백리를 가야 봉황성이다.
만일 이 성을 옛 평양이라 한다면 당서에 이른바 5백리란 말과 서로 부합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선비들은 단지 지금 평양만 알기에 기자가 평양에 도읍했다하면 이를 믿고 평양에 정전(井田)이 있다하면 이를 믿으며 평양에 기자묘가 있다 해도 이를 믿어서 만일 봉황성이 곧 평양이라 하면 크게 놀랄 것이다.
더구나 요동에도 또 하나의 평양이 있었다하면 이는 해괴한 말이라 하며 나무랄 것이다. 그들은 요동이 본시 조선의 땅이며 숙신, 예(穢), 맥(貊)등 동이(東彛)의 여러 나라가 모두 위만조선에 예속되었던 것을 알지 못하고, 또 오라, 영고탑, 후춘 등지가 본시 고구려의 옛 땅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연암 박지원은 명나라 영락제가 이동시켜놓은 봉황성에 가보고는 그 자리에서 아니라고 확실하게 단정했다. 이는 이미 조선왕조 초기부터 명나라 영락제의 지명이동을 통한 역사왜곡을 받아들여 고구려의 강역을 한반도로 몰아넣은 반도사관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3월 9일 총공격명령을 내린 당태종이 70일 만인 5월 17일 요동성을 함락시키고 안시성에서 철수한 날짜가 9월 18일이다. 2개월을 토산 쌓는데 허비했다면 4개월 10일 만인데, 만일 하남성에서 서만주까지 행군해오려면 최소 6개월은 더 걸렸을 것이다. 따라서 서만주에 있다는 요동성과 안시성은 지명이 옮겨진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중국의 지명변경이 이루어지기 전 원래 안시성은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후원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