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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달러 환율이 결국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연평균 환율(1402.3원)을 넘어섰다. 연평균 기준으로 1400원을 돌파한 것은 한국 경제가 겪어온 어떤 국면과도 다른 의미를 갖는다. 외환이 바닥나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았던 1998년과 달리 지금은 경상수지 흑자가 유지되고 외환보유액도 충분하다. 그런데도 환율이 오르고 있다는 것은 기존 경제 논리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방증이다. 문제는 이 상황을 단기적 현상으로 가볍게 볼 수 없다는 데 있다.
정부는 확산되는 불안 심리를 잠재우기 위해 부랴부랴 진화에 나섰다. 특히 시장에서 제기된 ‘국민연금 동원설’에 대해 연일 선을 긋고 있다. 국민연금의 해외투자 확대가 원화 약세를 부추긴다는 지적에 대해 정부는 “기금 운용체계 논의일 뿐 환율 안정을 위해 연금 자금을 동원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1400조 원이 넘는 기금 규모와 580조 원에 달하는 해외 자산을 감안하면, 연금의 움직임이 환율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가볍지 않다. 정부가 굳이 ‘4자 협의체’라는 이례적 틀을 만든 것 자체가 현재 상황의 민감성을 증명한다.
문제는 환율 상승이 국민 생활과 기업 경영 전반에 직격탄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환율이 오르면 원화 자산 가치가 떨어지고, 수입물가와 장바구니 물가가 상승한다. 해외 여행·유학 비용도 치솟는다. 기업은 원자재 가격 부담 증가로 수익성이 악화된다. 특히 중소기업은 환 헤지 능력이 거의 없어 속수무책으로 손실을 떠안는다. 이미 많은 기업이 손익분기점을 넘어 손실 구간으로 밀려났다는 조사도 나와 있다. 고환율이 길어지면 연쇄 부도와 생산 축소, 투자 위축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크다.
여기에 내년 예산이 역대 최대 규모로 편성되며 ‘확장 재정’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도 부담 요인이다. IMF, OECD, KDI 등 국내외 기관이 한목소리로 재정 건전성 악화를 경고하고 있음에도, 정부는 지출 확대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60%에 육박하고 있으며, 비기축통화국인 한국의 특성상 이는 결코 가벼운 수치가 아니다. 재정 건전성이 무너지면 국가 신용도가 흔들리고, 이는 다시 환율 상승을 자극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기 처방이 아니다. 우선 한국 경제의 투자 매력도를 높여야 한다. 서학개미가 국내 시장으로 돌아오려면 기업 경쟁력과 성장 산업의 미래성, 자본시장 신뢰 회복이 전제돼야 한다. 구조개혁도 필요하다. 생산성 정체, 노동 경직성, 규제 중첩, 기술 투자 부진 등 한국 경제의 고질적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또한 재정 기조 전환이 필요하다. 성장률이 둔화하는 국면에서 부채 확대는 위험하고, 재정 공간이 좁아질수록 정책적 대응력은 약화된다.
환율이 IMF 시절을 뛰어넘었다는 건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경제의 체력, 정책 신뢰도, 구조적 경쟁력, 국제 자본 흐름 속 위치가 모두 시험대에 올랐다는 의미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때와 다르다’는 안일한 인식이 아니라, ‘지금이 더 위험할 수 있다’는 냉정한 자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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