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30] 싱겁고 재미없는 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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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1-21 06:30:44

기순이 학원 복도에서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덩치가 큰 남자였는데 승연은 기순을 못 본 척하고 강의실로 들어왔다. 기순이 따뜻한 커피 두 잔을 들고 와 승연 곁에 앉았다. 나, 김태주 선배 봤다. 승연은 노트를 꺼내며 관심이 없다는 듯, 말을 거니까 반응할 뿐이라는 듯 반문했다. 어디서? 기순은 커피를 후루룩 소리내며 마셨고 목구멍에 급히 삼키며 대답했다.

“학원 입구에서.”

고등학교 선배가 지나가는 것 같아서 쫓아갔거든, 옆에 김태주 선배가 있더라고. 학교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못생긴 내 선배 곁에 있어서 그런가 잘생겼더라. 딴 사람 같았어. 기순이 영어 교재를 꺼내며 우연히 첫사랑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승연은 김태주 얘기가 별로 궁금하지 않았지만, 기순이 이야기를 끝내도록 인내심을 가졌다. 여긴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내 선배도 파고다 다니더라고. 우리랑 다른 과목. 무슨 과목 듣는다더라, 까먹었네. 김태주 선배는 오늘 일이 있어서 만난 건가 봐. 둘이 친구래.

내가 인사하는데 그냥 아, 네 안녕하세요. 그게 끝. 참 싱겁고 재미없는 사람이야. 다음 주 월요일에 선배가 점심 사 준대. 너도 나와. 승연은 김태주처럼 싱겁고 재미없게 대답했다. 내가 뭐 하러. 둘이 점심 먹어. 기순이 김태주를 봤다고 했을 때 승연은 그가 하나의 이미지로 떠오르지 않았다는 게 신기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내내 술만 마시고 시선을 분산하지 않았던 남자, 담배를 쓸쓸하게 삼키는 남자, 사물놀이가 음악치료에 도움된다고 말했던 남자의 얼굴은 각각 다른 이미지였다.

승연은 뜬금없이 기순에게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 메릴 스트립과 나왔던 로버트 레드포드를 아느냐고 물었다. 지적인 이미지라 어려서부터 좋아하던 배우라며. 기순이는 아웃 오브 아프리카도 몰랐고 메릴 스트립도 몰랐다. 로버트 레드포드도 모르는 배우라고 했다. 기순이는 승연이 어떤 것을 물으면 모르는 내용이라는 반응을 자주 보였다. 아는 체하는 것보다 모른다고 해야 겸손해 보이는, 기순의 사회생활 처세인지 정말 모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몰라서 무식한 느낌보다는 몰라서 순진한 쪽에 가까웠다.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도 안 본 거야? 그거 주말 극장, 명절용 단골 영화였는데”

그제야 기순은 기억나는 것처럼 말했다. 아, 그 배우는 알지. 승연은 김태주가 쌍꺼풀 없는 로버트 레드포드를 닮은 것 같다고 했다. 기순은 로버트 레드포드를 안다고 해 놓고 조금 전에 본 김태주의 얼굴과 로버트 레드포드를 매치시키지 못했다. 한참 생각하다가 아니지, 태주 형은 쌍꺼풀 없는 미키 루크에 가깝지. 미키 루크? 나인 하프 위크? 그 사람은 야한 이미지인데? 김태주는 어느새 두 여자가 떠올리는 배우들의 접점에 있었다. 로버트 레드포드와 미키 루크는 서로 닮지 않았는데 김태주는 그 둘을 닮아 있었다. 각자가 생각하는 이미지에서 한 조각씩 가져와 조합하니 닮은 꼴이 됐다. 기순이 고등학교 선배와 점심 먹고 와서 승연에게 전해준 김태주에 대한 정보는 의외였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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