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K-아트가 세계 무대로의 진출을 서둘러야 할 시점이다. 하지만 진단해 보건대 아직 미비한 부분이 많다.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이 작가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렇게 말하면 좀 의아하게 생각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필자도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의 시장 규모나 사회적 수요에 비해 작가가 너무 많이 배출되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여러 아트페어 등 현장에서 보면 우리 화단에 경쟁력 있는 작가가 의외로 많지 않음을 실감하게 된다. 특히 우리의 정체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고수하고 있는 한국화의 경우 더 심하다.
반세기 전만 하더라도 한국화는 미술 시장의 주축이었다. 나름 팬덤도 확보한 걸출한 작가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화려한 과거와 달리 지금은 많이 위축돼 있다. 재능이나 감각이 있는 학도들이 웹툰이나 애니메이션 같은 인기 분야로 대거 이동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무엇보다 한국화에는 긴 수련 과정이 요구된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강한 자극이 경쟁력이 되는 현 시대 미술의 속성을 감안할 때, 한국화의 내공이나 뚝심만을 가지고는 잘 통하지 않을 때가 많다. 이제 한국화에도 시대의 변화무쌍한 미감이나 다양성의 양상들에 대처할 수 있는 시야와 유연성이 요구된다.
지금은 한국화 본연의 가치가 재정립되고 탐구되어야 할 시점이다. 이유는 단 하나,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우리 문화의 모토, 바로 그 중심에 한국화가 놓여 있으며 기대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채색 한국화가 이영지(49)는 바로 우리 한국화의 위상과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표본이다. 작가에게 차기 K-컬쳐의 바톤을 맡기고자 하는 데엔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딱 한 가지만 꼽아도 될 것 같다. ‘우리’에 기반한 치유의 콘텐츠들이 세계 시장에서도 똑같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남양주 미사리에 있는 작가의 작업실에 다녀와 거기서 느낀 소감을 몇 자 적어 본다.

끝없는 점과 선으로 뒤덮인 이영지의 채색화 세계. 이영지의 작업엔 평범한 대지에서 광물을 캐듯, 평범한 소재나 대상에서 시학과 미학을 추출해 내는 발군의 내공이 담겨 있다. 나무도 나무 나름이다. 이 땅에 널린 나무들 가운데 수형이 빼어난 나무, 수령이 오랜 나무, 기품이 넘치는 나무 등 얼마나 많은가. 다양한 외관의 많고 많은 나무들 중에서 작가가 고른 것은 그 이름도 정체도 알 수 없는 나무들이 대부분이다. 그 나무들은 현실 속에 있다기보다 관념이나 상상 속에 있는 것들이다. 무수한 점들과 선들로 환원되는 기호화된 나무들이다. 생태나 이미지상으로 보면 사람을 닮은, 혹은 의인화된 나무일 수도 있고 인간의 마음을 간직한 나무일 수도 있다.

나무·꽃 못지않게 작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또 있다. 바로 허공 혹은 여백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더 비중 있게 생각하는 작가에게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이 대목은 채색화와 수묵화를 절충적으로 타협시키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의 화면 속 여백에는 대부분 옅은 수직의 먹선들이 누적되어 있다. 얼핏 보면 비가 오는 모습일 수도 있지만, 이영지 작가의 여백은 사실 다의적 공간이다. 화면이라는 신체의 기관 아닌 기관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없음’을 ‘있음’의 또 다른 의미로 이해하는 고유의 변증법적 세계관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의미도 의미지만 그것은 화면을 깊이 있게 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 선들은 담묵 갈필의 수직선으로 비교적 가지런하게 그어져 있다. 속도에 따라 농담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 정적인 화면에 생동감과 함께 그윽한 안정적 색감을 주고 있다. 주연은 아니지만, 결코 존재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여백은 무수한 형용사로 기술될 천의 얼굴을 지니고 있으면서, 천성적으로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그저 사람의 직관과 감성에 유독 친근하게 반응해 오는 부분이다.



그림을 조금이라도 직접 그려 본 사람은 안다. 모필로 일정하게 길이가 긴 필선을 그려 나간다는 것, 특히 자 같은 도구를 쓸 수도 없이 같은 선을 계속 반복적으로 그려나가는 것이 얼마나 수고스러운 일인지 말이다. ‘인고의 미학’이라 말하고 싶다. 어깨를 고정하여 일정한 힘과 속도로 전신을 움직여 줘야 하는 전신 지문(指紋). 작가의 혼과 인격이 투영된 지문과도 같은 필선을 그려 나가는 고행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그것은 어두운 땅속에서 삶을 영위하기 위한 뿌리의 치열한 선(線) 운동에 비견할 수 있다. 화면의 질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 관객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상호작용을 촉발하는 수행에서 뿌리 이야기가 빠질 수는 없을 것이다.

좀 진부한 이야기 같지만 작가의 철학이나 태도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작품에 대한 애호나 대중의 취향은 각각 다를 수 있지만 작품에서 배어나는 내면세계에 대한 직관적 반응은 대체로 비슷할 것이다.
대중의 감각과 취향이 과거와는 확연히 다르다.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형성된 교양의 수준이 질적으로 달라졌다. 의미를 좀 놓치는 경우가 있을 수는 있지만, 작가가 얼마나 진지하고 성실했는지는 금방 알아챈다는 뜻이다. 단순히 시각적 측면에서 볼 때 이영지 작가는 여백의 유현한 깊이를 구현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성공한 거다. 그런데도 더 나아가 필선의 행위를 수고스럽게 수행하는 것, 그것은 관객에게 독해할 권리를 더 부여하려는 데서 오는 것 아닐까. 관객이 작품에 참여하는 장으로서 말이다. 웅장한 일필휘지로써가 아니라 온화하고 진지한 인격과 태도로써 관객을 만나고자 하는 겸허함은 결코 진부한 이야깃거리가 아닐 것이다. 이는 교과서적으로 잘 훈련 받고 성격적으로도 올곧은 데서 비롯되는 결과일 것이다.

요컨대 이영지가 정성스럽게 가꾸고 있는 이 유토피아 같은 정원은 치유와 웰빙의 안식처다. 이 판타지 같은 정원은 방문자들에게 아무런 부담이나 긴장감을 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극 자체도 가급적 억제하는 가운데, 상처투성이인 내면을 회복시켜 정상적이고 평온한 자아로 복귀시키는 마법을 발휘한다. 그러고 보면 필자가 ‘영지 나무’라 부르는 화면 속 나무들과 꽃들은 관객의 정서를 순화시키는 데 최적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 목적으로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배양시켜 온 식물들인 셈이다. 하여 그는 ’영혼의 정원사‘라는 라이선스를 보유한 아티스트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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