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적인 놀이 정신으로 무대를 달리는 연극이 있다. ‘조치원 해문이’ ‘조치원 새가 이르는 곳’ ‘닭쿠우스’ ‘불가불가’ 등 한국연극에서 패러디 연극을 개척한 이철희 연극 ‘맹’이다. 1940년대 초반 발표한 ‘맹진사댁 경사’(오영진 작)을 이철희 특유의 코드로 재구성했다.
‘맹진사댁 경사’는 영화로 드라마로 다양한 연극무대로 여전히 공연되는 작품이다. 이철희 연출이 ‘맹’을 소극장 무대에서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만 해도 맹진사댁 시집가는 경사스러운 잔칫상이 소극장으로 이동되면 재밌겠다고 하고 넘겼다. 연극인 한 명이 “이철희 연극은 똑같겠죠” 했다. 맞다. 잘 봤다. 그의 연극에서 반복적으로 관통되는 재료들만 보면 그렇다. 충청도 언어, 놀이성, 웃음, 재구성의 전복성 등 그러나 무대의 조리사로 몇 가지 고정재료들은 필수다. 전문기술들은 연출마다 다르다. 재료가 같다고 같은 맛을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이철희는 ‘조치원 해문이’ 통해서는 햄릿의 비극성을 세종시(조치원) 일대 개발붐으로 고향의 도시가 인간의 탐욕과 욕망으로 권력이 되고 죽음의 비극적인 풍경으로 허물어져 가는 고향의 부조리한 모순을 진지한 웃음으로 겨냥하고 응축시켜 내면서 충청도 언어에 웃음의 리듬과 비극의 우울성을 형성하고 한국인의 정서와 연결되는 햄릿을 그려냈다.
단타로 끝날 것 같았던 이철희 뚝심은 극단 코너스톤을 본격적으로 가동하면서 패러디 연극의 진미(眞味)라 할 수 있는 에쿠우스를 전복한 ‘닭쿠우스’를 선보인다. 마지막 장면에서 알런은 닭의 투구를 쓰고 인간의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다이다이 박사를 연민(憐憫)의 심연으로 포옹한다. 원작에서는 말의 눈을 찌른 알런의 정신 분열적 행동을 통해 순수한 인간 내면의 결핍과 정신 분열의 원인을 추적하는 장면이 그려진다. 이 사이에 드러나는 연출의 시선이 특별하다.
인간을 구원할 수 없는 종교적 시선과 숭배, 욕망과 비정상의 광기로 균열 된 인간의 자아를 다이사트의 시선으로 마주하게 되는데, 패러디된 ‘닭쿠우스’는 인간의 추한 욕망과 결핍된 자아를 극복하고 넘어설 수 없는 무기력하고 나약한 인간(다이다이)을 소년(알란)이 온기로 포옹하는 것으로 패러디한다. 원작은 소년을 중심으로 말의 눈을 찌른 정신 분열의 내면을 분석하고 추적하지만 웃음으로 무장된 닭쿠우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불안전한 내면의 인간들을 이철희의 웃음과 놀이 정신으로 그려냈다.
이철희는 보수적인 한국연극의 분위기에서 서구적이고 엘리트적인 시선으로 볼 때 소재성과 재구성된 패러디 연극으로 세련된 집(무대)을 짓지 못하는 배우 출신의 연출로 작가의 인식을 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릴레이로 충청도 연극시리즈를 선보인다.
‘조치원 새가 이르는 곳’을 통해서는 안정된 무대와 배우들의 연기와 조합으로 인간구원의 존재와 탐색의 질문을 던졌다. 이철희 특유의 놀이성으로 현대사회의 희비극성을 드러내면서 ‘이철희의 진지한 시적(詩的 뚝심’이 제대로 된 인정을 받는 분위기로 형성되었다. ‘불가불가’를 통해서는 80년대 불가불가의 시대극 의상을 지어내고 극중극의 역사를 웃음으로, 때로는 동시대를 타격하는 정치 권력의 시대로 역사를 제 환기하고 풍자시키는 감각적인 불가불가를 놀이로 전진했다. 그렇게 형성된 연극은 권력의 입과 귀를 막고 흔드는 측근들의 비리와 부패의 칼날 사이에서 가도, 불가도, 불가불, 가도 아닌 채로 반복되는 모호한 불가불가의 언어유희가 오마주 되고 이현화가 재현해 내는 희곡의 역사를 이철희는 광화문 앞에서 그의 놀이의 언어로 재생산시키면서 비로소 이철희는 완전한 B급 오해의 계급장을 떼고 그의 연극은 독자적인 언어가 된다.
이철희의 재료는 다르다. 다른 방식으로 말을 걸고 무대를 지킨다. 이것으로 작품마다 맛을 다르게 내며 현재 시간 무대로 형성되는 의미와 연극의 맛은 다르게 우려낸다. 우리의 박자와 리듬을 만들고, 경쾌한 현대적인 풍자성으로 이철희는 특유의 패러디와 놀이로 매서운 돌려차기를 한다. 무대로 전진하며 쌓아 올려내는 장면에는 우리 정서가 맞닿아 있고 웃음에는 비극성이 배어있다. 풍자에는 이 시대의 부조리와 모순, 유형의 인간들이 들어있다. 이번 작품도 이철희 특유의 패러디성과 재구성의 감각으로 현대적인 ‘맹’으로 압축시켰고 소극장 무대는 이철희식 배우들의 놀이 정신 무장해 우리 전통의 마당으로 돌려놓았다. 작품 제목도 권력과 신분 상승의 욕망에 어두운 ‘맹’한 ‘맹’ 진사를 겨냥하면서도 한 음절로 들리는 맹의 소리에는 우리의 리듬감도 들어있다. 제목도 이철희 연극답게 재치가 넘치고 등장인물의 모순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의미는 크다. 여전히 반세기를 넘겨도 신분 상승을 위한 맹 진사의 욕망은 자기 딸도 권력의 주변으로 밀어 넣고 추악한 현대판 맹 진사를 무대로 소환한다.
지금까지 공연된 ‘맹진사댁의 경사’는 360도 다른 맛이고 다른 풍경이다. 배우들의 입과 대사, 놀이로 우리 전통 리듬을 만들고 무대 주변의 현대식 방석은 전통극의 분위기를 만들면서도 이철희의 기발한 아이디어와 놀이로 소극장은 질펀한 우리의 현대판 놀이 마당극으로 세련되게 돌려놓는다. 맹 진사 머리에 올린 하얀 인조 머리 가닥으로 백마를 타고 달리고 싶어 하는 진사의 신분 상승을 위한 욕망의 말로 둔갑하고 관객들은 박수치고 웃고, 키득거리면서 소극장인 것을 잊게 만든다. 무대에 깔린 카펫은 서양극을 조롱하고 우리의 거리 마당으로 나온 것 같은 느낌까지 든다. 장면과 사이에 1초의 느슨한 전환도 템포가 처지면 이철희 놀이는 깨지는 그것처럼 배우들은 1초의 경계의 사이를 형성하지 않으려는 속도감으로 무대를 달리며 놀이로 뛰고 달리며 받아내는 대사의 사이가 벅찰 텐데도 말(대사)로 패스하고 그 말을 잡아 속도감으로 장면으로 이어 붙이는 배우들의 연기로 이철희의 ‘맹’은 같은 재료로 맛을 낼 수 없는 이철희의 연극과 언어를 형성하고 있다.
빈 공간에서 배우들의 연기로, 이철희의 감각과 놀이 정신으로 우리의 소리와 리듬을 만들고 템포감 있게 세워지는 장면 구성으로 진지한 웃음의 장단을 만든다. 아쉬운 점은 앞으로 공간의 확장성과 최대치로 압축되어 있는 연극 ‘맹’의 액기스 들을 느슨하게 풀고 집의 배치를 약간 이동해 다시 견고하게 지어보면 어떨까. 2, 3초의 여유 공간을 마련해 보면 좋을 것 같다. 이철희는 이번 작품으로 투박하고 다소 불편할 수 있는 우리의 한옥을 그만의 방식으로 유럽, 서구식 주택과 아파트가 아닌 살만한 우리의 집으로 개량시켜 놓았고 연극 ‘맹’ 이후부터 이철희의 연극은 그의 언어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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