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31] 로버트 레드포드를 닮은 미키 루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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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1-22 06:30:49

김태주 선배, 서울대 갈 점수였대. 그것도 상위권 학과로. 근데 오산 캠퍼스 4년 전액 장학생을 고른 거래. 대학교 1학년 1학기까지 과외 아르바이트로 몇 년 치 생활비를 벌었다는 건 덤이었다. 그래? 우리 학교에 그런 인물이 있단 말이야? 의외네. 그래도 이해가 안 된다, 왜 하필 오산이냐고. 승연은 믿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집안이 무지무지 어렵다더라고. 더 이상 묻기도 그렇고, 말하려고도 안 하더라. 몰랐냐고만 하던데?”

승연은 믿기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천재 머리를 가진 승호 오빠 친구가 떠올랐다. 공부는 잘하는데 집이 가난해서 4년제 장학금 받고 지방 공대로 갔던. 서울대 등록금이 싼데 왜 굳이 지방대로 가냐고 물었다가 전액 학비 면제에 용돈까지 받는 조건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김태주도 그런 케이스겠구나 생각했다.

김태주 스스로 신비주의자라 자처한 적은 없다. 승연이 생각하기에 오히려 신비로 감싼 누더기는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할 사람이었다. 그에 대한 이미지 퍼즐이 완성됐다. 말수가 적고 그림자 드리워진 표정이 어디서 왔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지적인 이미지는 로버트 레드포드를 닮았고 담배를 입에 물었을 때 풍겼던 염세적인 이미지는 미키 루크를 닮았다. 미키 루크의 퇴폐미가 자꾸 연상되긴 했지만, 어쨌든 기순의 말을 듣고 그가 달리 보이긴 했다. 승연은 기순에게 관심 없는 척, 다시 태주에 대해 물었다.

“근데 혹시 희숙 선배랑 김태주랑 사귀는 사이 아니야? 둘이 자주 붙어 다니던데.”

기순은 들고 있던 종이 커피잔을 입에 물며 팔에 돌돌 말아 두었던 고무 끈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정수리께에서 묵었다. 종이컵에 있던 뜨거운 커피가 쏟아질까 봐 승연이 컵 아래로 손을 갖다 댔다. 기순은 재빨리 머리를 묶고 나서 삐져나온 앞머리를 정리하며 컵을 다시 들었다.

“아냐, 아냐. 그 둘은 연인이 아니야. 희숙 선배는 애인이 있대. 서울대 다닌다는데?” 승연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모를 안도감으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지만 기순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래? 그럼, 김태주는? 김태주는 애인이 있대?” 기순은 손에 들었던 커피를 한꺼번에 삼키고는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모르지 나야. 근데 김태주 선배 애인 있다는 얘긴 못 들었는데. 은영이가 그러는데 우리 학교 여학생들이 가장 사귀고 싶어 하는 남자라나 뭐라나. 멋있게 생겼잖아 머리도 좋고 안 그래?” 승연은 관심 없다는 듯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 정도는 아니고. 그리고 난 관심이 없어서”

한 달 남은 방학을 두고 영어학원에 시간을 다 쏟는 건 밑지는 장사 같았다. 같은 내용을 오전 오후 하루에 두 번이나 듣는 건 열의보다 오기에 가까웠다. 슬슬 지겨워졌다. 남은 방학은 친구들과 여행도 가고 디스코텍도 가고 미팅도 하고 싶었다. 현실과 타협하는 건 쉬웠다. ‘할 만큼 한’ 여대생은 한 달 남은 방학을 남들처럼 지내기로 결심했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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