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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안의 빈틈없는 공간에서 그를 만날 확률을 계산에 넣지 않은 건 승연의 패착이었다. 승연은 석진과 한동네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서울대입구역에서 내리고 신도림역에서 환승하는 두 사람의 시착역이 홍대입구역인 걸 생각 못 한 것이다. 수요일 오전이었고 헤어진 지 한 달 만이었다. 석진은 헐레벌떡 달려오며 숨을 고르고 있는 승연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승연은 석진을 보는 순간 바람피우다 들통난 여자처럼 놀랐다.
“승연이 학교 가는구나.”
승연은 내심 반가운 마음이었다. 마음에 없는 결별 통보를 하고 한동안 그를 그리워했다. 대학생이 된 그는 전보다 멋진 모습이었다. 사실 쿨하게 대학 생활은 어떤지, 여자친구는 생겼는지 물어볼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서울대생의 학교 생활은 뻔할 만큼 멋있을 테고 여자친구가 생겼는지는 궁금하지 않았기에 가식적인 질문은 할 필요가 없었다.
“어느 학교인지 물어봐도 돼? 수업은 언제 끝나? 데리러 가도 될까?” 석진이 연달아 물었을 때 승연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산 넘고 강 건너에 학교가 있고, 네가 오다가 질려 버릴 거야.”
자꾸 묻는 게 귀찮았다. 석진이 싫어서가 아니라 아무렇지 않은 듯 대하는 석진의 자비심에 짜증이 났다. 짜증이 난 건 자존심 탓이었다. 어느 학교인지 말할 수 없었고 데리러 오는 건 더욱 끔찍했다. 서울의 그 많은 학교 중 한 군데도 못 가서 산 넘고 강 건너로 다니는 님을 보러 온다고? 승연은 후회와 미련 속에서 계속 그와의 결별이 마땅했다는 구실을 찾고 있었다. 그 먼 곳까지 오겠다는 건 ‘나를 버리고 가신 님아,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났으면 좋겠다’는 조롱으로 들렸다. 힘들게 학교로 찾아와서는 “너는 좋겠다. 자연을 벗 삼아서. 서울보다 공기 맑아서 공부하기 좋잖아” 이렇게 말하고는 쾌재를 부르겠지. 속으로 기껏 여기 오려고 나랑 헤어지자 했니? 쌤통이다, 할 거면서.
승연은 석진이 말을 거는 동안 계속 창밖만 응시했다. 석진이 어느 학교인지 알려 달라고 재차 묻는 게 귀찮았다. 승연은 이제부터 두 정거장 후면 내릴 신도림에서 1호선을 타고 한 시간 지나야 도착할 학교라고, 이제 됐냐고, 속이 후련하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승연은 신도림역에서 내릴 채비를 했다. 문 쪽으로 몸을 돌리자 석진이 승연의 팔을 잡아끌고는 귀에 대고 낮게 물었다.
“재수할 거라며, 왜 포기한 거니.” 승연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게 왜 궁금한 건데. 재수하면 뭐가 달라져?’ 승연의 눈빛을 읽은 석진이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원망과 굴욕과 자책이 섞인, 자존심 상했을 때의 표정이었다. 헤어진 관계에서조차 여전히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승연이었다.
승연은 매주 수요일 오전엔 집에서 30분 일찍 나와야 했다. 다신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와 마주치는 횟수만큼 패배감은 배가 될 테니까.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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