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11] 굳세어라 기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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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2-23 06:20:43

대학가 주변 술집은 목소리 큰 놈들의 세상이었다. 누구 목소리가 더 큰지 내기하듯 소란했다. 철학과 누군가가 소릴 질렀다. “미셀 푸코여, 영원하라!” 과 대표 박선희는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하라며 방금 들어온 승연 일행을 재촉했다. 승연은 자기소개하는 과정 없이 슬쩍 눈인사만 나누고 올 생각이었지만 건방지게 보일까 봐 오늘만큼은 유난 떨지 않기로 작정했다. 생머리 단발 정기순이 승연과 은영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손을 번쩍 들었다. 제가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기순은 상기된 표정이었지만 기대에 부풀었는지 겸연쩍게 웃었다. 촌스럽고 순박한 모습이었다.

정기순은 자기 이름에 기자가 들어간 건 기자 항렬이어서고 한자로 성할 기·순할 순이라고 했다. 처음 할아버지로부터 ‘기’자를 받은 기순 어머니는 여자 이름에 기가 들어가면 팔자가 세진다며 안 받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수지·지수·소연·지연 등 지적인 이름을 원했다. 할아버지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어머니는 기순이란 이름을 받고 말았다. 무리 중 누군가가 예쁜 이름이라고 외쳤다. 여기저기서 예쁜 이름 맞다, 맞장구쳤다. 기분이 좋아진 기순은 막걸리 한잔 마신 후 이어 본격적으로 자기소개를 이어 가겠노라 했다. 기순은 막걸리 한사발을 쭉 들이키더니 캬, 소리를 냈다. 박수가 터졌다. 손으로 깍두기를 집어 입에 넣었다. 술을 잘 못 마신다던 기순의 볼이 깍두기 색깔처럼 붉게 물들어 갔다.

한바탕 웃고 나서 기순은 자신의 출생 비밀을 털어놓았다. 기순 어머니는 후처였고 그게 기 센 이름을 안 받으려 했던 진짜 이유였다. 당신 업보 때문에 자기 자식만큼은 기가 센 인생에서 벗어나길 바랐다고 했다. 후처 신분인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 자랐다는 말엔 긴 침묵이 흘렀다. 이때 누군가 손뼉을 쳤다. 이에 모두가 함성을 지르며 응원의 의미로 ‘괜찮아’를 외쳤다. 후처 딸이 무슨 죄겠냐만 어머니가 후처라는 기순의 고백에 승연은 살짝 걱정했다.

지금이야 그녀의 솔직함이 기특하겠지만 결국 흉이 될 게 뻔했다. 승연은 흙수저의 성공에 열광하다가도 흙수저의 성공을 불편해 하는 사람들의 이중성을 알고 있었다. 솔직함은 양날의 칼이다. 관계가 좋을 때는 장점이나 안 좋을 때는 치명적인. 본처 자식들은 대학 보내고 싶어도 죄다 공부를 못해 대학에 못 갔으며 기순이 집안 통틀어 대학에 처음 간 존재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대목에서 승연은 비웃었다.

‘일류 대학 갔으면 난리 났겠구나’ 승연이 웃은 게 비웃음이란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해 다행이었다. 생각해 보면 기순이가 본처·후처 집안 통틀어 첫 대학생이 되어 이곳에 온 것이나, 명문대 간 오빠와 언니를 둔 집에서 이 촌구석으로 발을 디딘 승연이나 그게 그거였다. 승연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기순을 향한 자신의 비웃음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기순이는 씩씩했다. 박수를 받으니 으쓱했는지 허리를 절반이나 깊이 숙여 인사하며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뭘 열심히 한다는 거지?

굳세어라 기순아.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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