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62] 어쩌다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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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3-13 06:30:35

무슨 공부를 했는지, 싸움은 왜 그렇게 잘하는지 물을 수가 없었다. 승연은 옷가지에서 냄새가 가셨는지 냄새를 맡았다. 한가하게 보살필 여력이 없다고 말한 사람을 붙잡아 둘 순 없었다.

“물 한 모금 마실 시간도 없나요….” 승연이 태주 눈치를 보며 말했다.

“좀 더 있다가 나가자. 상황 봐서 나도 안으로 들어갈 거야.”

어쩌면 지금이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자유시간일지도. 태주는 주인집 부엌에서 물을 가져와야 한다며 나갔다. 태주는 유리병에 든 보리차를 가져왔다. 먹을 게 없네. 승연은 보리차를 두 컵이나 연거푸 들이켰다. 물어볼 때가 아닌 줄 알지만, 대답해 주지 않을지 모르지만, 승연은 듣고 싶었다. 학교엔 왜 안 나와요. 승연의 말에 태주는 피식 웃었다. 모르긴 해도 그 미소는, 한글을 못 뗀 아이와 칸트를 논하는 꼴과 같다는 의미였을 게다.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안 해 본 일이 없었어. 신문팔이, 구두닦이, 무역회사 사환, 찹쌀떡·메밀묵 장수, 우유 배달, 담배·만년필 장사…. 가장 비싼 노동이 과외였어. 내가 공부 잘한다고 소문나니까 사촌 형이 소개해 줘서 부잣집 꼴통 하나 가르쳤는데 4년제 갔어. 그때 걔 부모가 기분 좋다고 한 학기 등록금에 해당하는 돈을 주더라고. 그거 엄마 전부 갖다 드렸지. 난 내 인생에서 엄마가 그렇게 밝게 웃는 거, 처음 봤어. 돈이 행복을 주는구나. 근데 그 돈 내 형 감옥에서 빼느라 다 썼지. 형이 트럭을 모는데 새벽에 깜박 졸다 사람을 쳤거든. 있는 돈 없는 돈 다 긁어서 줘도 모자랐어. 누이동생은 미장원 시다야. 원장한테 빌려서 줬고, 나도 친구 변호사 형한테 사정해서 돈을 빌렸어. 돈 벌어서 갚겠다, 했거든. 과외 다시 시작하려 했는데 과외가 들어와야지. 대학 가기 전이야 공부 잘한 거 소문났으니 소개해 준 거고. 대학 들어와선 아무도 지방대생한테 자기 새끼 안 맡기더라고”

태주는 잠시 숨을 고르느라 말을 멈췄다. 시간이 약이라지만 고통을 복기하는 일은 여전히 버거워 보였다. 승연은 감히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공감하는 부분이 전혀 없는데 이해하는 척 고개 끄덕이는 건 위선이나 다름없었다. 승연은 상상하지 못한 타인의 삶이 이토록 가깝게 있었다는 게 미안했다. 태주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닥치는 대로 일했지. 막노동도 하고 염료 공장도 가고, 염전도 가고, 돈이 되는 곳은 다 갔어. 갚아야 하니까. 하루에 10시간씩 일하는데 시간당 500에서 800원이야. 그나마 주면 다행이고 못 받을 때도 허다했으니. 중·고등학교 때는 먹고살아야 하니 노동했고, 지금까지는 갚으려고 노동했어. 물론 얼마 전에 다 갚았고. 다시 먹고사는 노동 해야지. 대학 4년 장학금 주니까 왔지, 내 주제에 대학 다니는 거 사치지. 그래도 고등학교 졸업할 때만 해도 대학 나와야 몸으로 때우는 일은 안 하겠다 싶었어. 노동, 지긋지긋했거든.”

태주는 방문을 조금 열고 담배를 연거푸 피웠다.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연기에 담아 피우는 것처럼, 연기는 깊고 길었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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