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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이의 난세치세(亂世治世)] 강력한 군 건설 기반 된 6·25 국군 교육훈련
박정이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2-02 00:02:55
 
▲ 박정이 (예)육군대장·밀리테크협회 회장·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위원
1950년 6월28일 한강 이남으로의 전면적인 철수가 실시될 당시에 한국군의 병력은 5만6000명이었으며, 이와 같은 병력 규모는 전쟁 발발 이전과 비교해 약 44%가 감소한 것이었다. 당시 일일 평균 2000명 정도씩 발생하는 사상자에 대한 보충이 헌병과 경찰에 의한 가두 모집과 동시에 현지 입대라는 방식을 통해 이뤄졌기 때문에 체계적인 보충병의 확보와 훈련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불안정한 병력 충원 방식을 해소하고 보충병의 확보를 제도화하기 위해 미 제8군사령부는 전쟁 이전에 각 사단별로 행하던 신병 모집과 훈련을 중앙통제 방식으로 전환시키고 신병훈련소의 설립에 착수했다. 
 
8월14일 대구에 제1신병훈련소가 설립된 것을 시작으로 9월8일까지 총 5개(대구·김해·구포리·모슬포·삼량진)의 신병 훈련소가 설립되어 배출되는 일일 신병의 수는 2950명이 되었는데, 이 중 구포리의 제3훈련소에서 배출되는 500명의 신병이 카투사(Korean Augmentation to United States Army·KATUSA)로서 미군 부대에 배속되었다.
 
결국 신병 훈련이 체계화되고 징병검사가 정비되자 각종 청년단에 소속된 병역의무 적령기에 해당하는 장정들이 대부분 징병검사를 받고 군에 입대하게 되어 이승만 대통령이 전쟁 초기부터 미국에 끊임없이 무장을 요구했던 50만 청년단원들이 군 지휘계통 내로 흡수되어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보충병의 확보가 가능하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언제든지 군을 증강시킬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1951년 4월 말까지 군사고문단이 계획한 군사학교와 훈련소들의 설립이 완료되어 독자적인 운영이 시작되자 미국은 이승만정부와 협의하여 한국군 장교 교육에 대한 보다 장기적인 계획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한국군의 문제점이 능력있는 장교단의 부족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리지웨이 장군은 1951년 5월2일 미 제8군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에게 한국군의 장교 교육 계획 수립을 지시했다.
 
밴 플리트 장군은 주한 미 8군 교육참모부 소속의 머지트(Gilman C. Mudgett) 대령이 준비한 교육훈련사령부 설치 제안을 승인하고 리지웨이 장군과 협의하여 한국군 교육훈련의 개선을 책임질 적임자로 당시 극동군사령부 참모부장이던 참페니(Arthur S. Champeny) 준장을 임명했다.
 
한국군 교육 훈련의 개선을 책임지게 된 참페니 준장은 5월11일 미국으로 건너가 2개월간 머물면서 한국군 교육훈련에 관한 개선책을 마련했다. 보고서의 주 내용은 모든 군사교육기관을 관할할 기구로서 교육훈련사령부를 설치하고 교육의 효율성을 위해 군사교육기관을 한 지역으로 통합시키며, 군사교육기관에 배치된 미 군사고문관의 수를 확대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대규모 한국군 장교들을 미 군사학교에 유학시키고 장교후보생 교육 기간을 18주에서 24주로 연장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1951년 8월1일 교육총감부가 창설되어 모든 군사교육기관을 감독하고 통제하게 되었다.
 
교육훈련사령부는 보병학교와 포병·통신훈련소를 광주지역으로 통합시키고 1952년 1월6일 1만5000명 수용 규모의 육군훈련소(상무대)를 설립했으며, 1952년 2월11일까지 포병·통신·공병·경리훈련소를 학교 체제로 전환시켰다.
 
밴 플리트 장군은 1951년 9월22일 802명이 증가된 군사고문단 인원 배치표를 육군성에 건의하여 1952년 1월17일 승인받아 기존의 인원보다 6배가 많은 400명을 군사교육기관에 배치했다. 이에 따라 군사고문단은 4년제 육군사관학교를 1951년 10월30일 진해에서 창설해 1952년 1월20일 공식적으로 개교했다. 군사고문단은 4년제 사관학교 설립과 더불어 고급장교들에 대한 재교육을 위해 1951년 10월28일 6개월 과정의 지휘 일반 참모 대학을 육군본부 직할로 대구에 설립했다.
 
1950년 11월 군사고문단은 1952 회계년도에 미 병과학교에 한국군 장교들의 위탁교육을 추진해 20주간의 특별 기본과정으로 보병학교와 포병학교에 각각 150명과 100명씩의 장교가 파견되었다. 또 이와는 별도로 각 병과학교의 일정에 맞춰 소규모 단위의 장교단이 추가로 모집되어 미 병과학교에 보내졌다. 미 병과학교에서의 교육과정은 보병학교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위관급 장교를 대상으로 한 초등군사반 교육과정으로 교육기간은 11~20주로 다양했다.
 
결국 1954년부터 1960년까지 9186명이라는 많은 수의 장교가 미국에 파견되어 선진 군사지식과 기술을 연마하게 됐다. 미국이 한국군의 자질 향상과 지휘체계의 공고화라는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실시한 교육훈련 체계의 혁신 노력은 단기간에 큰 성과를 거두었고 현대화된 강력한 군 건설의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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