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1] 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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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2-06 06:20:22

좋았어? 나는 좋았는데. 남편은 일이 끝나자 돌아누워 이내 깊은 잠에 빠졌다. 눈곱만큼의 좋았던 기분마저 -그런 게 있기나 하다면- 증발시키는 남편의 반복 재생하는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산만했다. 승연은 슬슬 데시벨이 올라가는 남편의 코 고는 소리를 피해 거실 베란다로 나왔다. 나갈까, 나가서 달려 볼까. 어디라도 좋으니 차를 몰고 달리고 싶었다. 창문을 열고 달리면 이 찜찜한 기분이 바람에 쓸려 갈지도 몰라.

승연은 힘껏 액셀을 밟으며 바람 샤워하는 자신을 상상했다. 헤벌린 입을 통해 바람이 들어와 입술과 혓바닥의 수분을 모두 날려 버렸다. 수분이 마르자 바람은 다시 쓰리도록 목구멍을 핥았다. 목이 따가웠다. 아니 목이 말랐다. 물 말고 뭔가 다른 것을 마시고 싶었다. 맥주를 마실까. 아니야, 그건 기분을 더 불쾌하게 만들 거야. 술을 마시면 초반에는 좋다. 갈수록 우울해진다. 그것은 감정 없이 치르는 남편과의 잠자리와 같다. 끝은 지독한 허무다. 술 생각이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세상에 물과 술 말고 마실 게 없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목이 마른 게 아니라 그냥 갈증이었다. 그것도 짜증 나는 갈증. 갈증이 아니라 목이 타는 거였다.

거실엔 항상 푸른빛이 돈다. 질려서 그렇겠지. 사는 사람들에게 질려서 집은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나만 그렇다면 거실은 용서해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 오늘은 수정이까지 가세했다. 늦게 낳은 딸이라 항상 미안했다. 자식 안 낳고 사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자식은 빨리 낳을수록 좋아. 부모가 빨리 죽는다는 것은 아이들이 어머니·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살아야 하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얘기거든. 남편에게 들은 소리 중 가장 나은 통찰이었다. 그래서 임신하려고 기를 썼고 노산인 데다가 자연분만은 더 위험하다는 소릴 들어 가며 고집스레 나은 아이였다. 낳고 보니 걱정투성이인. 키우는 내내 언제 어른이 되나 궁금했던 그 아이가 오늘 확실하게 존재감을 발휘했다. 제 엄마의 상처를 후벼 파는 것으로, 살을 벌리고 거기에 소금을 뿌리는 것으로. 소금을 떠올리자 갑자기 고등어라는 소설이 생각났다. 미친년, 대체 그런 건 왜 쓴 거야.

수정이는 현관에서 시간을 끄는 편이다. 집에 들어올 때면 매번 신발 앞부분을 현관 쪽으로 돌려놓았다. 그것도 신발코까지 선을 맞추면서. 자기 것만 그러는 게 아니었다. 남의 것도 그렇게 해 놔야 마음이 편한 것 같았다. 수정이 가지런히 놓아둔 신발을 볼 때마다 승연은 ‘내가 이렇게 정돈된 사람이었나’ 착각하곤 했다. 물론 이제는 익숙해졌고 -자기만 그렇게 한다는 게 아니라 타인의 행동을 기꺼이 수용한다는- 그러려니 했었다. 오늘은 현관 잠금장치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도 수정은 조금 더 시간을 끌었다.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 물어볼까, 말까 망설이느라? 아니면 분노를 예열하기 위해서? 거실로 들어서면 ‘엄마, 배고파’가 컴백 홈을 알리는 시그널이었다. 오늘은 달랐다.

“엄마 학교 때 대체 뭘 하고 다닌 거야?”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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