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세기 지적 혁명에 지대한 공헌을 한 드니 디드로. 그는 철학·소설·연극·예술 비평 등 모든 장르를 넘나들며 수많은 작품을 쓴 다작 작가였다. 편협함을 비판하고 전통적 도덕의 권위를 거부한 그는 이성의 승리와 인간 행복의 보편성을 위해 싸웠다.
디드로는 20년간 이끌어 온 백과사전 프로젝트가 마무리되자 다른 형태의 글쓰기에 전념했다. 이전 몇 년 동안 그는 이미 몇 가지 주요 내러티브 작품을 쓰기 시작했지만 완성하지는 못했다. 예를 들어 ‘수녀’ ‘라모의 꿈’ ‘운명론자 자크’ 등이 그러했다. 작곡가 장필리프 라모의 조카인 그는 반교권적이고 매우 독창적인 이 작품들을 다시 작업하고 완성할 시간을 가졌다. 디드로에게 글쓰기는 자신의 생각을 형성하는 내면과의 대화였다.
해외로 나가 활동하는 것을 꺼린 디드로는 프랑스 국내에서만 주로 활동했다. 그러나 1773년 여름, 러시아 황후 캐서린 2세의 초청을 받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했다. 몇 년 전 캐서린 2세는 디드로의 도서관을 사들여 남긴 수익을 디드로에게 주었다. 이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그는 러시아 교육을 위한 자신의 통찰력을 황후에게 기부하기로 하고 그녀의 궁정에 머물며 ‘캐서린 2세를 위한 회고록’을 써서 헌정했다.
그러나 이 여행은 디드로의 건강을 매우 악화시켰다. 러시아를 떠나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7개월간 체류하고 파리로 돌아왔지만 그의 건강은 회복되지 않았다. 따라서 많은 저작 활동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배우에 대한 역설’ ‘원수와의 대담’ ‘클로드와 네로의 통치’ 등 에세이 작품을 썼고 1781년에 마지막 연극 작품인 ‘그는 선한가? 그는 악한가?’를 완성했다. 늙고 병든 디드로는 결국 뇌졸중으로 쓰러져 그해 7월31일 사망하고 말았다. 5개월 전 죽은 그의 연인 소피 볼랑의 뒤를 따른 듯했다.

볼테르가 ‘플라톤의 형제’라고 불렀던 디드로에게 인간은 모든 것의 중심이었다. 근본적인 무신론자였던 그에게 신은 본능과 열정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유지해야만 달성할 수 있는 행복의 장애물이었다. “과학과 도덕을 통해 우리는 진보를 위한 자유를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바로 디드로가 믿었던 백과사전의 역할이었다.
관용의 휴머니즘과 무한한 호기심, 철학과 문학을 결합시키고자 노력했던 디드로의 작품은 진리 자체보다 궁극적으로 더 중요한 진리를 추구하면서 인간과 사회의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게 하는 즐거운 초대장이었다.
디드로의 장례식은 파리 생로슈 성당에서 진행됐다. 가족의 사회적 지위와 디드로의 명성에 걸맞게 위엄 있는 장례식이 치러졌고 그의 소원대로 이 성당의 성모 예배당에 묻혔다. 친척들은 만족했고 그들은 죽은 이를 위해 평화의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여전히 광신도였던 그의 형은 디드로의 저작물을 압수해 불 속으로 던져 넣으려는 소동을 벌였다.
디드로는 저명한 동료인 장 자크 루소나 볼테르(본명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보다도 더 냉철하고 호기심이 많으며 활기찬 철학자였다. 이 백과사전의 아버지에게 딱 맞는 한 단어는 바로 ‘자유’였다. 그에게 자유란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동의하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저명한 미래학자 자크 아탈리는 이 철학자의 보편적 정신의 환상적 본질을 강조하며 디드로를 위인의 성전인 팡테옹에 모시고자 캠페인을 벌이는 중이다. 아탈리에 따르면 디드로는 비교할 수 없는, 그리고 매우 인간적인 근대성의 선구자이다.
디드로가 묻힌 파리 생로슈 성당은 예술가들의 본당으로 간주된다. 이곳은 많은 조각 기념물과 그림 등 매우 풍부한 예술 컬렉션으로 17·18세기 프랑스 학교의 진정한 박물관으로 여겨졌다. 이 성당에는 역사를 만든 수많은 인물이 묻혀 있는데, 극작가 토마스 코르네유·루이 14세의 수석 정원사 앙드레 르 노트르·철학자 디드로·로코코 미술의 대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등이 대표적이다.

파리 1구에 위치한 생 로슈 성당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리 멀지 않다.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이 성당의 첫 번째 돌은 1653년 루이 14세에 의해 놓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궁정 건축가 자크 르 메르시에가 이 성당의 건축을 맡아 진두지휘했지만 도중에 죽고 자금이 부족하자 공사가 중단됐다. 그러나 1719년 스코틀랜드인 존 로(John Law)가 10만 파운드를 기부해 건축이 재개됐다. 개신교 신자였던 로는 탐나는 재정 관리관 자리를 얻기 위해 신교를 버리고 천주교로 개종해야 했다. 이 저명한 경제학자는 생 로슈에서 첫 영성체를 받았다.
이 성당은 혁명 기간 동안 종교적 기념물을 약탈당하고 파괴되기 시작했다. 이때 디드로의 무덤도 비워졌고 그의 유해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1795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왕당파 반란군을 기관총으로 사살한 장소는 바로 이 성당 계단이었다. 혁명적 충돌의 상징인 총알 구멍은 2000년 이 성당이 복원될 때까지 건물 외관에서 볼 수 있었다.
생 로슈 성당은 이제 성스러운 색으로 칠해진 성가대의 파이프 오르간과 부조로 장식된 성모 예배당 등 진짜 보물이 있는 아름답고 인상적인 성당으로 재탄생했다.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된 생 로슈 성당은 파리에서 두 번째로 장대한 성당이다. 완성되는 데 수십 년이 걸린 만큼 고전과 바로크 등 다양한 건축양식이 어우러진 파리의 특급 명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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