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노동당 지지율 추락… 증세논란·선물스캔들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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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범 석 달도 안 돼 여론조사 총리 직무 지지도 24%로 급변
‘노인난방비’ 삭감해야 한다며 고급선물 챙긴 것에 ‘위선’ 비판
‘성장’ 강조하면서 ‘최저임금 인상’ ‘제로아워 노동계약 금지’ 계획

임명신 기자 기자페이지 + 입력 2024-09-23 16:27:20

▲ 영국 노동당 전당대회의 키어 스타머 총리와 안젤라 레이너 부총리. 집권한 지 석달도 안 돼 공공부문 삭감 논란과 선물스캔들로 지지율 추락을 겪는 가운데 노동당이 '성장'을 강조하며 이와 모순된 '최저임금 인상'과 '신축성 노동시간 계약 금지'를 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출범한 지 석 달이 채 안 된 영국 노동당 정부가 복지삭감 논란과 선물스캔들 속에 지지율 급락을 겪고 있다. 22일(현지시간) 일간 가디언 일요일판(옵서버)이 여론조사 기관 오피니엄과 함께 조사해 이날 발표한 응답률에 따르면 키어 스타머 총리의 직무수행을 ‘지지한다’ 24%, ‘반대한다’ 50%였다. 지지율·반대율 격차가 -26%로, 7월19일 조사 때(+19%)보다 45%p나 벌어졌다.

20일 발표된 입소스 여론조사(18∼75세 1082명)에서도 노동당 정부에 ‘만족한다’ 비율이 22%에 불과했으며 50%는 실망감을 표했다. ‘잘하고 있다’ 응답 역시 25%로 7월 조사 당시(36%)보다 크게 떨어진 반면 ‘잘못하고 있다’는 14%에서 42%로 뛰어올랐다. 7월4일 총선에서 노동당이 ‘보수당 정권 심판론’ 덕분에 압승했지만 새 정부에 대한 기대가 빠르게 냉랭해졌다.

거대한 식민제국의 역사 끝에 영국은 다인종·다문화 비기독교 국가의 다양한 고민을 안게 됐다. 유명한 복지국가 개념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제출한 나라지만 그런 이상을 지탱하기 어려워진 지 오래다. 유럽 변방의 섬나라로서 척박한 환경을 딛고 일찍이 바다를 경영하며 산업혁명 발상지를 넘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우뚝선 바 있다. 그 성공담 속에 쌓인 모순이 드디어 한계에 도달한 것이기도 하다.

이제 영국에선 사회의 중추이자 식자층에 속한 의사·교사들이 월급 인상을 위해 거리 시위에 나설 정도다. 보수당 시절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와 우크라이나전쟁 장기화가 부담을 가중시켰다. 전쟁 초기 휴전협상에 임하려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을 만류하며 대대적 지원을 약속한 게 당시 보수당 보리스 존슨 총리였다. 재정 적자에 허덕이는 영국에게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화제의 신간 ‘부자 미국 가난한 유럽’(손진석 저)에 유럽 침체의 배경이 잘 요약돼 있다.

집권 초기 언론·여론과의 ‘허니문 기간’이 너무 빨리 끝난 것을 개탄하는 한 노동당 소속 하원의원의 말을 파이낸셜타임스(FT)가 인용했다. 그는 제일 먼저 “내달 말 나올 ‘고통스러운 예산안’”을 꼽았다고 한다. 이어 “그보다 더 큰 문제”로 선물스캔들을 들며 “노동당이 우스꽝스러워 보일 것”을 우려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헌신과 청렴 이미지의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이 기부자들에게 고가품 선물을 받아 문제가 된 꼴이다.

21일 FT와 가디언이 6월 노동당의 재력가 와히드 알리 상원의원에게 업무 수행을 위한 3550파운드(약 632만원) 상당의 현물(의류)을 기부받았다는 안젤라 레이너 부총리, 작년 1월∼올해 5월 네 차례 다른 기부자로부터 7500파운드(1335만원)를 받아 의류 구입에 쓴 레이철 리브스 재무장관 얘기를 보도했다. 다 신고를 마친 상태이긴 했다.

앞서 스타머 총리는 그동안 알리 의원으로부터 자신과 부인 빅토리아 여사가 받은 각각 1만6000파운드(2849만 원)·5000파운드(890만 원)어치 의류 등 선물을 자진신고했으나 규정보다 늦어져 논란이 일었다. 총리 자신이 아스널 축구 경기나 테일러 스위프트 콘서트 관람권을 선물 받았다는 사실까지 구설에 올랐다.

레이너 부총리가 지난 연말연시 닷새간 알리 의원의 미국 뉴욕 맨해튼 아파트에서 보내고 이를 1250파운드(222만 원) 상당의 선물로 신고한 것 또한 논란이 됐다. 레이너는 22일 BBC방송에서 이와 관련해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다. 내가 지나치게 투명했던 모양”이라며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정치인의 선물수수는 28일 내 당국에 신고하면 위법이 아니다. 다만 노동당 정부가 노인난방비 대폭 삭감 등 정책을 추진하면서 벌어진 일이라 시선이 따갑고 제1야당 보수당에선 이를 ‘위선’으로 몰아가려 한다.

노동당 정부는 보수당으로부터 ‘구멍 난 재정’을 물려받았다며 공공부문 지출 삭감이나 일부 증세 가능성을 내비쳐 왔다. 영국 양대 노조 중 하나인 유나이트의 샤론 그레이엄 사무총장은 노동당 전당대회가 열린 이날 스타머정부가 영국을 ‘제2의 긴축’으로 이끌고 있다면서 연금생활자 난방비 삭감 대신 부자 증세를 하라고 목소리 높였다.

비판이 이어지자 스타머 총리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신중론을 펼쳤다. 옵서버에 그는 “우리 공공서비스가 절박한 상황이며 삭감이 어떻게 느껴질지 안다”면서도 “공공부문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증세와 관련해선 “노동계층과 관련된 약속”이 우선시될 것을 밝혔다. 총선 공약대로 소득세·국민보험료·부가가치세(VAT)는 현상 유지, 자본이득세 및 일부 상속세가 인상될 전망이다.

22일 전당대회에서 각료들이 긍정적인 메시지를 보내려 노력하는 모습이었다고 로이터통신이 전했다. 레이너 부총리가 “영국을 성장의 길로 되돌리기 위해 기초를 고치고 있다”면서도 최저노동시간이 따로 없는 ‘제로아워 계약’(고용인이 필요할 때 근로를 요청하는 형태의 고용계약) 금지, 최저임금 인상 등 노동자 권리 개선 법안을 다음달 상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성장에 도움이 될 방침은 아니다.

임명신 기자 imms@skyedaily.com 기자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