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쓰는 역사 [29] 충절의 대상으로 선비들에게 사랑받은 배롱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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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름, 지루함을 달래주는 백일홍의 다른 이름

스카이데일리 기자페이지 + 입력 2024-09-23 10:29:25

▲ 나무에 붉은 꽃이 오랫동안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배롱나무는 충절의 대상이 되었다. 윤상구 사진작가

“화무십일홍 권불십년(花無十日紅權不十年)”

열흘 이상 붉은 꽃은 없고 권력은 10년 이상 유지할 수 없다는 유명한 경구다. 권력을 얼마나 오랫동안 손에 쥘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열흘 이상 개화가 지속되는 꽃은 거의 없다는 말은 맞는 것 같다. 꽃이 피어나면 머지않아 반드시 지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100여 일, 즉 석 달 가까이 꽃을 피운다는 나무가 있다. 배롱나무. 그래서 그 꽃을 ‘백일홍’이라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한 송이가 100일 동안 피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나무의 아래쪽부터 위쪽으로 꽃들이 차례로 피어나는데 그 전체 기간이 100여 일이라는 것이다.

‘비단처럼 아름답고 노을처럼 곱게’ 피는 꽃

▲ 사람들은 꽃이 오랫동안 핀다고 하여 자미화에 ‘백일홍나무’라는 이름을 붙였다. 윤상구 사진작가

조선 시대 강희안(1417~1465)이 쓴 우리 역사상 최초의 원예서 ‘양화소록(養花小錄)’에 관련 내용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백일홍은 최소한 그 이전에 한반도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자미화(紫微花)라 불린 이 꽃을 당나라 때부터 관공서에 많이 심었다고 한다. 유우석이라는 중국 시인은 그 모양을 “붉은 꽃은 인끈(관복에 매는 끈)을 드리운 듯, 금빛 꽃술은 칼끝을 모아 놓은 듯”이라고 묘사했다. 강희안은 백일홍을 “비단처럼 아름답고 노을처럼 곱게 뜰을 훤히 비추고 사람의 눈을 현란하게 한다”고 평가했다.

사람들은 꽃이 오랫동안 핀다고 하여 자미화에 ‘백일홍나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소리 나는 대로 ‘배기롱나무’로 변했다가 지금은 배롱나무가 되었다. 나무에 붉은 꽃이 오랫동안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배롱나무는 충절의 상징이 되었고 이를 중요하게 여기는 선비들에게 사랑받는 나무가 되었다.

조선 시대 충신 중 대표적 인물로 꼽히는 성삼문도 배롱나무를 아껴 한 편의 시로 표현했다.

“어제 저녁에 꽃 한 송이 떨어지고/ 오늘 아침에 한 송이가 피어/ 서로 일백 일을 바라보니/ 너를 대하여 좋게 한잔하리라”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 등이 단종 복위를 꾀한 것은 세조 즉위 4개월 만이었다. 때마침 창덕궁에서 중국 사신을 위한 연회가 열렸는데 연회석상에서 칼을 차고 임금을 지키는 별운검으로 성삼문의 아버지인 성승과 유응부가 선정되었다. 일이 아주 순조롭게 돌아가는 듯했다. 그런데 세조가 연회 장소가 좁다는 이유를 들어 별운검에게 들지 말도록 명하였고 또한 세자도 병 때문에 연회장에 나오지 못했다. 한명회의 권유에 따른 일이다.

배롱나무꽃을 아껴 시를 읊은 성삼문

유응부는 계획대로 거사하기를 주장했지만 성삼문과 박팽년이 “세자가 경복궁에 있고 왕이 운검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은 하늘의 뜻이오. 만약 이 창덕궁에서 거사하더라도 혹시 세자가 경복궁의 군사를 이끌고 온다면 일의 성패를 알 수 없으니 훗날을 기약합시다”며 거사 일을 미뤘다.

그런데 함께 모의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인 김질이 자신의 장인에게 이 계획을 알려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발각되었다.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고 가담자 모두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목숨을 잃었다.

집현전 학사로서 훈민정음 창제 때 커다란 공을 세웠던 성삼문은 백일홍에 대한 시 외에도 여러 편의 시가를 남겼다. 성삼문이 사형장으로 끌려갈 때 읊었다는 한시도 전해진다. 시를 읊을 한가한 상황이 아니었던지라 성삼문의 시가 아니고 그의 충절을 흠모하는 후대 사람이 그의 이름으로 지은 작품일 것이라는 설도 있다. 그래도 죽음을 앞둔 사람의 처절한 심정은 읽는 이의 가슴 깊은 곳을 두드리기에 충분하다.

“북소리 둥둥 이 목숨을 재촉하는데/ 돌아보니 지는 해는 서산을 넘네/ 저승으로 가는 길에 주막도 없다거늘/ 이 밤은 어느 집에서 쉬어 갈 건가”

지루하고 긴 여름 동안 홀로 화려하게 피는 배롱나무꽃

배롱나무가 쉬지 않고 붉은 꽃을 피워내는 시기는 봄꽃들처럼 세상을 화사하게 밝히는 꽃을 찾을 수 없다. 사방을 둘러봐도 짙은 녹음뿐인 그 지루하고 긴 여름 동안 배롱나무꽃이 거의 혼자서 화려하게 주변을 장식한다. 그것도 100여 일 동안이나 끊이지 않고 말이다.

‘죽어서 봉래산 가장 높은 봉우리에 커다란 소나무가 되었다가 흰 눈이 온 세상을 덮었을 때 나 혼자 푸르리라’고 시조를 읊었던 성삼문. 그는 ‘전날 저녁에 꽃 한 송이가 떨어져도 다음 날 아침에 다시 한 송이가 피어나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배롱나무처럼 어떤 역경에도 변치 않고 홀로 빛나는 삶을 살고 싶었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