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를 모티브로 현실과 픽션의 관계 탐구하는 쌍둥이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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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지 마이크 갤러리의 서울 개관전 ‘The Fox’
모노톤으로 만나는 트보로고프 형제… 10월28일까지

임유이 기자 기자페이지 + 입력 2024-09-23 13:44:06

▲ 관람객이 트보로고프 형제의 개인전 ‘THE FOX’를 둘러보고 있다. 레이지 마이크

서울 종로구 레이지 마이크 갤러리가 4일부터 10월28일까지 러시아의 젊은 화가 트보로고프 형제의 개인전 ‘THE FOX’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1988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의 아시아 첫 전시회다.

이들의 협업은 2009년 형 알렉세이가 생일을 맞아 동생 안톤에게 ‘비기닝 아티스트’ 세트를 선물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들은 2017년 모스크바 오토코매 갤러리에서의 데뷔전을 시작으로 모스크바 아티스갤러리(2019)와 런던 무시아트(2021·2023)·레이지마이크(2021·2024) 등에서 개인전을 열며 국제적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 트보로고프 형제의 협업은 2009년 형 알렉세이가 생일을 맞아 동생 안톤에게 ‘비기닝 아티스트’ 세트를 선물하면서부터 시작됐다. 레이지 마이크

트보로고프 형제는 동화를 모티프 삼아 현실과 픽션의 관계를 탐구한다. 그들은 일상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평범한 대상에 주목하는데 만화·애니메이션·비디오 게임·일러스트레이션·인형극 등 어린이를 위한 장르에 관심을 둔다.

이러한 시각 매체는 아직 사회화되지 않은 인간이 바깥세상을 이해하고 학습하는 최초의 시각 언어다. 이 매체들은 밀가루 반죽처럼 말랑말랑한 상태의 뇌가 처음으로 세계관을 형성해 나가는 빵틀과도 같다.

이처럼 트보로고프 형제는 누구에게나 친숙한 캐릭터 모델을 거울삼아 동시대 사회와 인간상을 비춘다. 이들은 유화·아크릴화·조각 등 매체를 가리지 않고 동화의 장면을 묘사하는데 내러티브 중심의 전통 동화에서 벗어나 그들만의 새로운 예술 언어를 구축해 나간다.

▲ Fox and monster(여우와 괴물), 2022, Oil on canvas, 102x200cm, Courtesy of Lazy Mike

▲ Fox feeds a wolf(늑대에게 먹이를 주는 여우), 2022, Oil on wood, 30x40cm, Courtesy of Lazy Mike

▲ Burning letter (타오르는 편지), 2022, Oil on wood, 30x40cm, Courtesy of Lazy Mike

트보로고프 형제의 작품은 크게 세 가지 키워드로 분석할 수 있다.

첫째는 ‘동화 모티프’다. 형제는 활동 초기부터 동화의 어법을 꾸준히 현대미술에 적용해 왔다. 단순한 형상·초현실적인 배경·귀여운 이미지 등 누구나 유년 시절 접했을 대중문화를 차용해 향수를 자극하고 동화에서 얻은 모티프로 현실을 뒤바꾼다.

관객은 트보로고프 형제의 작품을 보면서 잃어버린 동심과 상상력·호기심·장난기 그리고 어린이의 자유로운 에너지를 다시 소환한다. 하지만 이 동화적 모티프는 개인의 그리운 심상을 일으키는 데에만 가볍게 소비되지 않는다.

동화는 순수하지 않다. 한 인간을 사회인으로 성장시키는 제일의 매체로서 동화에는 그 사회가 요구하는 질서·관습·고정 관념이 잠재해 있다. 트보로고프 형제의 작품은 동화라는 따뜻한 껍질을 입고 있지만 그 너머 차가운 현실에 바짝 다가서 있는 것이다.

둘째는 ‘의인화’다. 형제를 상징하는 듯한 쌍둥이 곰 그리고 곰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여우·개구리·새는 작가의 작품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도상이다.

이들 캐릭터는 아이와 어른·고대인과 현대인·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상징물이다. 작가는 인류의 역사에서 유구한 전통을 지닌 의인화 기법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문화 코드로 내세워 보편성을 강조하고 더 많은 관객과 긴밀하게 상호 작용한다.

특히 형제의 작품에 등장하는 곰은 전통적으로 강인한 남성을 상징한다. 또한 명사에 성별 개념이 있는 러시아어에서 여우는 여성형 단어로 인식된다.

하지만 대중문화에서 그려지는 두 동물의 이미지는 조금 다르다. 인간의 최대 천적인 잔인한 곰은 동글동글한 외형의 귀여운 만화 캐릭터로, 반려동물로서 사육되기도 하는 여우는 시체의 장기를 빼먹는 섬뜩한 괴물로 묘사된다.

우리는 트보로고프 형제의 곰과 여우를 보면서 어떤 대상이 사회·정치·문화적 맥락에 따라 상반된 이미지를 얻는 구조와 그 메커니즘에서 발생하는 현실과 대중문화의 간극을 유추할 수 있다.

마지막 세 번째 키워드는 ‘스틸 효과’다. 애니메이션의 어원은 ‘생명·영혼’을 뜻하는 라틴어 아니마다. 우리말로 ‘움직이는 그림(動畵)’으로 번역할 수 있다. 트보로고프 형제는 애니메이션 형식을 빌려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에는 아무런 스토리텔링이 없다.

곰과 여우는 모험을 떠나지도 역경을 이겨내지도 성장하지도 않는다. 영화의 스틸 컷처럼 가만히 멈춰있는 이들의 성격과 역할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동화책에서 무작위로 한 페이지를 찢어낸 듯한 그림은 선형적인 내러티브에 갇히지 않고 그 자체로 자유로운 그림의 파편이 되어 흩어진다.

또한 트보로고프 형제는 애니메이션 장르의 필수 요소인 플롯을 배제해 화면에 긴장감과 신비로움을 극대화한다. 이곳에서 관객은 수동적인 관람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림의 장면을 해석하는 번역가가 된다.

서사라는 중력이 사라진 땅에서 관객은 주인공 캐릭터와 그를 둘러싼 주변 세계의 미묘한 심리전을 겪는다. 이때 모노톤으로 일관된 색채는 저마다의 새로운 이야기를 직조하도록 이끄는 가속 장치가 된다. 우리가 머릿속에서 투명한 붓과 팔레트를 꺼내게 만드는 유인체가 되는 것이다.

곰과 여우가 뛰어노는 무대는 그 붓질에 맞춰 울창한 산이나 넓은 바다로 변신하기도, 무한한 우주로 확대되기도 한다.

기존의 동화들이 교육과 훈육을 목적으로 한 교과서에 가깝다면 형제는 그 어디에도 원작이 없는 열린 결말의 애니메이션을 새롭게 제시한다. 그리고 우리를 각본의 자리로 초대한다.

임유이 기자 lye@skyedaily.com 기자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