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7년 11월16일,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생 장 르 롱(Jean Le Rond) 세례당 계단에서 전나무 상자에 담긴 신생아가 발견됐다. 이 아기는 발견된 장소의 이름을 따 장 르 롱이란 세례명을 받았다.
친모는 당대 유명한 여류작가 클로딘 게랭 드 탕생(Claudine Guérin de Tencin) 부인이었고, 친부는 지역 포병 장군 카뮈 데뚜슈(Camus Destouches)였다. 이들은 불륜 관계로 아이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낼 수 없자 갓 태어난 아이를 친모가 성당 계단에 몰래 버렸던 것이다. 다행히 가난한 유약공의 아내 가브리엘 퐁티유가 이 아이를 발견해 데려갔다. 하지만 이 여인의 남편은 곧 세상을 떠났고 가브리엘은 또 다른 유약공 알렉상드르 니콜라 루소와 재혼했다. 루소 부부는 장 르 롱을 소중히 길렀다. 이 은혜를 잊지 못한 아이는 양부모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48년 간 함께 살았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장 르 롱 달랑베르(d’Alembert)다. 계몽주의시대 위대한 철학자였던 그는 비판적 사고와 지식을 보급하는 데 선봉장 역할을 해 ‘유럽의 횃불’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프랑스어를 읽을 수 없는 사람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게 수많은 삽화가 포함된 책을 출판해 당시의 지식과 기술을 유럽 전역으로 전파했다. 이 철학자를 러시아의 카트린 2세와 프로이센의 프레데릭 대왕은 볼테르와 디드로만큼이나 총애했다.

문학·철학 등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던 달랑베르는 아카데미 학술 활동에 참여하고 백과사전의 ‘예비 담론’을 집필했다. 하지만 그는 물리학과 수학으로 후세에게 더 알려져 있다. 물리학자들은 ‘달랑베르의 원리’로, 수학자들은 대수학의 기본 정리를 증명한 ‘가우스 달랑베르’로 그를 기억한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던 달랑베르는 1752년에 ‘음악의 이론과 실제’를 출간했고, 1754년에는 ‘일반 음악과 프랑스 음악’을 출간했다. 이 작품들은 바로크 음악의 작곡자 장 필립 라모(Rameau)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달랑베르는 다재다능했다. 이는 아마도 친부모로부터 탁월한 DNA를 물려받은 까닭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 친아버지 데뚜슈의 숨은 조력이 컸다는 소문이다. 탕생 부인이 아이를 임신한지 6개월 됐을 때 데뚜슈는 전보발령을 받고 마르티니크로 떠났다. 거기서 약 1년 간 근무하고 파리로 귀환하자마자 그는 탕생부인을 찾아가 아이의 행방을 물었다. 그녀는 크게 당황했지만 슬픈 진실을 고백했다. 아들이 입양 간 사실을 알게 된 데뚜슈 장군은 양어머니를 찾아가 연금을 주고 장 르 롱이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남몰래 지원했다고 한다.
달랑베르는 이 덕에 네 살부터 열두 살까지 기숙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1730년부터 1735년까지 마자랭이 세운 최고의 학교에 다니며 얀센주의와 데카르트식 교육을 받았다. 예술 학사 학위를 받은 그는 법학과 의학에 도전했고 마침내 수학까지 섭렵했다. 천재적인 그는 스물두 살에 파리 아카데미에 첫 수학 작품을 발표했고, 스물네 살 약관의 나이로 천문학 부위원장으로 임명됐다. 서른일곱 살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는 영광을 안았다.
프레데릭 왕은 다방면에서 탁월한 달랑베르를 베를린 아카데미 회장직에 앉히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는 고사했다. 카트린 2세도 그에게 상당한 보조금을 주면서 왕자의 가정교사가 되 주길 간청했지만 이 또한 거들떠보지 않았다. 달랑베르는 밖으로 나가기보다 파리 안을 돌며 생활하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그는 문학살롱을 드나들며 사교적인 생활을 즐겼다.

이를 운명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친어머니를 잊지 못해 그녀의 언저리를 맴 돈 것으로 보아야 할까? 달랑베르의 친모 탕생 부인은 아들이 태어난 1717년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문학살롱 ‘라 메나주리(La Ménagerie)’를 오픈한 여인이다. ‘영혼의 사무실’라고 불리는 이 살롱은 처음에 법조계와 은행가의 투기꾼들이 모여 정치와 금융을 이야기 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1733년에 문학과 철학의 중심지로 발전했고 큰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탕생 부인은 뒤부아 추기경과의 인연으로 권력층과 가까웠고 리슐리외 추기경과 다르장송 후작 등 당대의 세도가들을 연인으로 두고 있었다. 이는 가장 위대한 작가·정치인·철학자들을 ‘라 메나주리’의 손님으로 확보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볼테르와는 앙숙이었기에 이 철학자는 그녀의 살롱에 절대 얼씬거리지 않았다. 볼테르의 친구인 달랑베르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다른 살롱에 다녔다. 문학살롱 조프랭이었다. 마리 테레즈 조프랭은 어린 시절부터 문학인·정치인·외교관들을 접대하는 살롱을 여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그녀는 탕생 부인을 자주 찾아가 교육을 받았고 1727년 마침내 자신의 문학 살롱을 열었다. 이 살롱에 콩디악·콩도르세·튀르고 같은 철학자·정치인·경제학자들이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령의 아내였던 조프랭은 남편의 반대로 살롱을 운영하는 것이 자유롭지 못했다. 다행히 1749년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조프랭 부인은 살롱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생토노레(Saint-Honoré) 거리에 있는 자신의 호텔에서 매주 예술가·학자·문인·철학자, 그리고 백과사전 학자들을 모이게 했다. 그녀의 살롱은 ‘백과사전의 실험실’이 됐다. 달랑베르·볼테르·디드로는 이곳의 단골손님이었다. 곧 이 살롱은 그들 덕에 최고의 명성을 얻어 갔다.
이 호텔은 오늘날 파리 1구 생토노레 거리 374번지에 흔적이 남아 있다. 파리의 유서 깊은 역사와 문화, 그리고 최신 명품 숍과 고급 레스토랑이 즐비한 거리에 자리한 마담 조프랭 호텔은 루이 15세 시대에 지어진 고급 저택이다. 큰 직사각형의 아치형 창문으로 들어오는 조명과 대형 발코니는 정면 중앙에 활기를 듬뿍 불어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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