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 도의나 상식에 비추어 보면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의 명분과 공천·지배·운영 구조는 여간 비정상이 아니다. 그런데 지독한 비정상을 준엄하게 응징해야 마땅한 국민의힘의 그것 역시 정치의 본령에 비추어 보면 비정상에 속한다.
정치의 본령이 무엇인가? 무수히 많은 국가적‧국민적 과제‧위기 중에서 어떤 것이 우선인지, 가치 간 충돌 시에 어느 쪽이 우선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첫째다. 정치가 운용할 수 있는 자원인 권위‧이념‧법령‧예산‧정부‧공공기관‧공권력 등으로 우선 과제와 가치의 손을 들어 주어 해결하는 것이 둘째다. 이는 왕정이나 민주공화정이나 동일하다. 다만 공론장과 선거를 통해 권한과 책임을 위임받는 민주공화정은 과제와 가치의 우선순위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유권자·대중의 공감과 동의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정치의 본령에 충실하려면 우선 가치와 차선 가치를 구분하고, 먼저 할 일과 나중에 할 일, 혹은 하면 안 될 일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정치가 해결해야 할 과제 전체와 저울질해야 할 가치 전체, 또한 가늠해야 할 지형(정세) 전체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다. 깊은 우물을 파고 들어앉아 우물 안 세계와 우물 위 하늘만 아는 관료·교수·변호사·의사·시민운동가 등 전문가가 정치의 본령을 체화하려면 별도의 연단·보정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현재 정부·여당의 핵심 지도력(리더십)은 직업공무원 출신으로 생애 최초 공직선거에서 당선된 대통령, 현실 정치 경력이 2년이 안 된 0선 당 대표(비상대책위원장), 0.5선(2022년 6월 보궐선거로 당선된) 사무총장, 직업관료‧대학교수 출신 0선 공관위원장, 여론조사 전문가 출신 씽크탱크 수장(여의도연구원장), 현실 정치 경험이 일천한 대다수 비대위원과 역시 직업 관료 출신 대통령비서실장과 정책실장 등이다. 한마디로 정치라는 업의 성격(본령)에 비추어 보면 여간 비정상이 아니다. 동서고금의 경험과 지혜는 수많은 과제 중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시급하고 해결 가능한 과제인지를 파악하는 능력과 상충하는 가치들 간 조화와 균형을 잡는 능력에 정부의 성패가 달려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런데 법령과 예산·관행과 감사 등에 의해 직무·조직과 권한·책임이 세세하게 규정된 정부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정치의 본령에서 멀어지기 십상이다. 예외는 항시 있지만 행정 관료는 대체로 정책의 정교함(전문성)과 효율성을 중시한다. 검사는 매사를 범죄 내지 이권 카르텔의 시각에서 보고, 판사는 법과 원칙에 합치되는지를 중점적으로 본다는 것이 중론이다. 꿈과 희망을 파는 장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정치를 경원시할 가능성이 큰 것이다.
교수나 언론인의 직업병(?)도 잘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도 선거 경험이 일천하면 대중의 시각에서 메시지와 정책을 생각할 기회, 즉 정무적 판단력을 기를 기회를 많이 가질 수 없다. 바로 그래서 이런 정무적·정책적 취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국정 운영 플랫폼을 만드는 것이다.
정치가 해결해야 할 과제·저울질해야 할 가치·가늠해야 할 정세 전체에 대한 연구·고민을 용광로에 넣어 국정 철학‧국가 비전‧국정 과제를 만들어 정당의 강령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백서·120대 국정 과제 등으로 문서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국민의힘과 윤석열정부는 국정 운영 플랫폼이 매우 엉성하고 부실하다. 후발자의 이익을 고려하면 가장 부실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적인 예로 국가 소멸을 초래한다고 아우성인 초저출산‧저출생 관련 정책이 ‘120대 국정과제’에는 사실상 없다. 3대 개혁에 관한 내용도, 의대 정원 대폭 증원 정책도 없다.
저출생 문제는 2024년 대통령 신년사에서 비로소 연금‧노동‧교육 등 3대 개혁과 동렬의 최우선 국정 과제로 부상했다. 하지만 1월18일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내놓은 저출생 대책(총선 공약)을 비교해 보면, 국민의힘은 관료적 편향이 역력하다. 민주당은 2자녀 출산 시 24평, 3자녀 출산 시 33평 주택을 제공하고, 가구당 1억 원 대출 후 첫째 출산 시 무이자 전환, 둘째 출산 시 원금 50% 감면, 셋째 출산 시 원금 전액 감면 등 포퓰리즘이 듬뿍 묻은 공약을 내놨다.
반면에 국민의힘은 육아휴직 급여 상한을 210만 원으로 상향하고, 아빠 출산 휴가를 유급 1개월로 늘리는 등 관료적 정교함과 소심함이 듬뿍 묻은 공약을 내놨다. 이는 각각의 위성정당의 비례대표 후보에서도 재연되었다. 상대는 제2촛불혁명을 일으키겠다는 포부를 공유하는 전사‧정치 조직의 연합체인데 반해 국민의힘은 항상 해 오던대로 나름의 성공스토리가 있는 전문가 집합일 뿐이다. 뭐든 자신의 편향과 한계를 직시만 하면 극복 가능하다.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은 자신의 눈과 뇌를 규율하는 오랜 습과 프레임을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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