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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식의 대고구리]
안개 낀 장충단공원의 슬픈 역사
명성황후 지키다 순국한 홍계훈·이경직 추모 제단 터
일제시대 때 훼손돼 비석만 남아… 현 신라호텔 자리
성헌식 필진페이지 + 입력 2022-12-09 11:00:27
 
▲ 성헌식 역사칼럼니스트·고구려역사저널 편집인
1960년대 불멸의 가수 배호가 불러서 히트시킨 안개 낀 장충단공원이라는 노래는 부르면 부를수록 구구절절 참으로 애절하기 그지없다도대체 어떤 사연이 서려 있기에 들으면 들을수록 이토록 가슴이 애잔해지는 걸까?
  
(1) 안개 낀 장충단공원 누구를 찾아 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 울고만 있을까, 지난날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 뚜렷이 남은 이 글씨, 다시 한 번 어루만지며 돌아서는 장충단공원
 
(2) 비탈길 산길을 따라 거닐던 산기슭에, 수많은 사연에 가슴을 움켜쥐고 울고만 있을까, 가 버린 그 사람이 남긴 발자취 낙엽만 쌓여 있는데, 외로움을 달래 가면서 돌아서는 장충단공원
 
위의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과 뚜렷이 남은 이 글씨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가슴을 움켜쥐고 울어 버린 수많은 사연과 가 버린 그 사람이 남긴 발자취는 과연 누구의 사연과 발자취일까? 이 노래가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하며 흐느끼는 단순한 사랑의 노래일까? 그 슬픈 사연의 세계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다.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은 배호의 노래와 먹거리인 장충동 족발만 알고 있을 뿐 장충단공원에 얽힌 슬픈 사연은 물론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그 이유는 서울남산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탓도 있겠지만, 이 나라가 해방 후 친일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바로 장충단은 대한제국 때 세워진 국립현충원(顯忠院)의 원조 격으로 항일의 상징이자 극일의 표상이었는데, 해방 후 정권들이 장충단과 그 정신을 제대로 복원하지 않고 말살해 버렸기 때문이다.
 
장충단은 1895년에 일본 정부가 저지른 국가범죄인 을미참변과 깊은 관련이 있는 곳으로, 당시 명성황후를 지키다 순국한 훈련대장 홍계훈과 궁내부대신 이경직 등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제단이 있던 곳이다. 이후 장충단은 대한제국의 현충원과 같은 성지(聖地)가 되었으나, 1910년 경술국치 후 일제가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철저하게 파괴해 버렸다.
 
 
▲당시 경성시가도, 전차 종점 장충단은 현재 신라호텔 자리. [필자 제공]
 
장충단이 세워진 유래
 
광무제 4(1900) 1027(양력)에 전 남소영(南小營) 터에 장충단(奬忠壇)을 세우라고 명했다. 을미참변 때 명성황후를 지키다 산화한 훈련대장 홍계훈과 이하 장졸들과 궁인들을 위해 매년 봄·가을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였다. 이후 을미년에 죽은 대신 이경직 등과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 죽은 충신들의 위패가 모셔졌다고 한다.
 
이렇듯 장충단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혼백을 모셔 놓은 호국의 성지로 국립현충원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사당을 세움으로써 군사들의 사기가 오르고 임금이 세상 사람들을 격려하고 어리석은 백성을 분발시키는 국가 정의가 바로 세워졌던 것이다.
 
당시 항일·배일의 인물들이 장충단에 제향됨으로써 장병들을 크게 감격·고무시켰으며 일제의 횡포가 극심해짐에 따라 국민의 장충단에 대한 경모심도 더욱 커지게 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해 시중에 애창된 한양가(漢陽歌)’에는 남산 밑에 지은 장충단 저 집, 나라 위해 몸 바친 신령 뫼시네. 태산 같은 의리에 목숨 보기를 터럭같이 하도다. 장한 그분네와 같은 구절이 있어 그러한 일면을 말해 주고 있다.
 
장충단에 모셔진 주요 두 인물은 다음과 같다.
 
홍계훈(洪啓薰·1842~1895) :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를 업고 피신시킨 공으로 훗날 훈련대 연대장이 되었다. 을미참변 때 광화문 앞에서 일본군의 침입을 저지하다가 죽었는데, 이사벨라 비숍이 쓴 한국과 그 이웃들이란 책에는 일본 장교의 칼에 피습 당한 뒤 여덟 발의 총탄을 맞아 치명상을 입었다고 한다.
 
이경직(李耕稙·1841~1895) : 명성황후의 외사촌 오빠. 1895년 궁내부대신이 되었고 을미참변 때 왕비의 침전인 옥호루에서 난입하는 폭도들을 막다가 총탄을 맞고 고종이 보는 앞에서 이들의 칼에 참혹하게 잘려 죽었다.
 
▲ 장충단의 위치를 알려주었던 비석. [필자 제공]
 
장충단에 세워진 비문은 1905년 을사늑약에 반대하며 자결한 민영환(閔泳煥)이 썼다
 
<국역문> 장충단비 전경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대황제 폐하께서는 자질은 상성(上聖)을 타고났고 운수는 증흥(中興)을 만나 태산과 만석 같은 공업을 세우고 불운의 조짐을 경계하였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시국이 가끔 험난하다가 마침내 갑오·을미사변이 일어나 무신(武臣)으로서 난국에 뛰어들어 죽음으로 충성을 바친 사람이 많았다.
 
, 그 서릿발보다 늠름한 의열과 태양처럼 빛나는 명절(名節)은 길이 재향을 누리고 기록에 남아 있어야 마땅하다. 이리하여 임금은 특별히 충성을 포상하는 의리를 기려 이에 애통해 하는 조서를 내리고 제단을 쌓고 비를 세워 표창하였으며 이어 또 봄·가을로 제사를 드리는 법을 정하여 높이 보답하는 뜻을 보이고 교화를 심으니 이는 참으로 백대를 놓고 보아도 없는 특전이다. 사가를 북돋우고 군심(軍心)을 분발시키는 것은 오직 여기에 있다. , 위대하다. , 훌륭하다.”
 
현재 장충단은 일제 때 파괴되어 없어졌고 그 자리에는 위락시설인 신라호텔이 세워져 있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현재 장충단공원에 서 있는 외로운 비석 하나뿐이다. 원래 장충단 입구에 세워졌었으나 장충단이 없어진 후 현 위치로 옮겨졌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지금까지 장충단은 과연 어떤 식으로 파괴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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