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액자산가들이 미국으로 향하고 있다. 상속·증여세 부담, 변동성 큰 환율, 공급망 재편, 고금리 장기화 등 복합 위기 국면에서 한국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이 드러나면서다. 이들의 관심은 단순한 부동산 투자나 영주권 취득을 넘어, 달러 자산 확보·자녀 교육·은퇴 설계까지 폭넓게 확장되고 있다.
한국이 올해 OECD 기준 다인종·다문화 국가로 전환될 가능성이 커지는 가운데, 세계 최대 이민국인 미국의 사례는 이민 확대 논의의 현실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미국은 매년 100만 명 안팎의 합법 이민자를 받아들이고, 불법 체류자까지 합치면 1000만 명 이상이 머무는 대표적 이민사회다. 멕시코·중남미 빈곤층부터 중국·인도 중산층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미국으로 향하는 이유는 경제적 기회, 정치·종교적 자유, 더 나은 교육 환경 등이다.
이민 덕분에 미국 노동시장은 구조적 활력을 유지하고 있다. 본토 출생 노동력은 감소했지만, 이민자 유입으로 지난해 전체 노동력은 2% 증가했다. 미 의회예산국은 높은 이민율이 향후 10년간 GDP 성장률을 연 0.2%포인트 끌어올릴 것으로 전망한다.
최근 뉴욕 맨해튼 중심부에 오픈한 법무법인 슈가스퀘어(Sugar Square Law & Advisors PLLC)의 움직임은 이러한 흐름을 잘 보여준다. 동남아·텍사스 달라스 등에서 이미 해외 법률 서비스를 제공해온 로펌이지만, 뉴욕 오피스는 한국·아시아계 자산가를 위한 실시간 법적·투자 지원 거점으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뉴욕 지사를 이끄는 김기동(Justin Kim) 미국변호사는 글로벌 로펌과 한국 대기업 법무팀을 모두 경험한 전문가다.
미국 향하는 40~50대…환율·상속세·교육 삼중 압력
폭발적 늘어난 E2 비자 수요…“달러 기반 체류권”
“3억 투자면 해결?”…E2 시장 과장 광고 리스크
기자는 김 변호사를 만나 한국 자산가들의 이주·투자 패턴 변화, 미국 비자시장 트렌드, 그리고 ‘탈원화’ 현상의 구조적 배경을 짚었다.
김 변호사는 미국행을 원하는 이들에 대해 “상담층의 범위가 넓어졌다. 강남에서 50억대 자산을 가진 분, 중소기업·스타트업 대표, 자녀 유학을 고민하는 40~50대 부모까지 다양하다. 한국에서 느끼는 경제 불안, 환율 스트레스, 상속·증여세 부담이 동시에 커지면서 미국 진출이 ‘현실적 옵션’이 됐다.”
특히 눈에 띄게 늘어난 문의는 △E2 투자비자 △부동산 법률 △송금·자금출처 규제 △지식재산권 관련 자문이다. “표면적으로는 ‘작은 사업체에 일정 금액을 투자하는 비자’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한국의 자산 구조 변화와 자녀 교육 수요, 달러 자산 필요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E2 비자는 법에서 ‘최소 투자금’을 정해두고 있지는 않다. 다만 한국 시장에서는 통상 3억~5억 원 수준의 실질 투자를 기준으로 비자 전략을 설계하는 경우가 많다. 영주권은 아니지만, 사업체가 정상적으로 유지되고 비자 요건을 계속 충족하는 한 통상 2~5년 단위로 반복 갱신이 가능해 사실상 장기 체류 옵션으로 활용된다.
부동산=영주권 오해…“미국 법제는 훨씬 복잡”
한국 상속세 50%의 공포, 미국·싱가포르 격차
환율 스트레스, 자산가를 먼저 흔든다…
김 변호사는 “한국 자산가들은 영주권이 목표인 경우가 많지 않다. 필요할 때 미국에서 머물 수 있는 ‘달러 기반 체류 옵션’을 더 중시한다”고 말했다.
자녀 교육 혜택은 E2 인기의 핵심이다. “부모 한 명만 E2 비자를 받으면 미성년 자녀는 E2 동반비자(E-2 dependent)로 미국에 체류하며, 거주지 기준 공립 초·중·고(K–12)에 추가 학비 없이 다닐 수 있다. 한국에서 조기유학을 보내면 1년에 7000만~1억 원은 드는데, 3억원 전후의 투자로 아이 둘이 몇 년만 공립학교에서 공부해서 그에 상응하는 교육비 절감 효과를 기대하는 부모들이 많다.”
다만 시장에는 위험도 존재한다. “일부 업체들은 ‘3억만 투자하면 비자가 나오고, 아이들 교육과 사업 성공까지 한 번에 해결될 수 있다’는 식으로 과도하게 홍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는 실제 절차와는 거리가 있다. E-2 비자는 투자금만으로 보장되지 않으며, 비자 심사 결과, 사업의 지속 가능성, 자금 구조 등 다양한 요소가 종합적으로 평가된다. 잘못 접근하면 비자 거절, 자금 회수 지연, 사업 실패까지 동시에 발생할 수 있어 각별히 주의가 필요하다.”
김 변호사는 ‘미국 부동산 투자 → 영주권’이라는 한국식 상식은 사실과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부동산을 샀다고 영주권이 나오는 경우는 없다. 해외 법인 설립, 고용 요건, 자금 출처 추적, 주·연방 세법까지 수십 개의 조건이 얽혀 있다. 잘못 접근하면 비자·자금·사업 모두 잃는다.”
한국 자산가들이 미국으로 눈을 돌리는 가장 현실적인 이유는 상속세다. 한국의 상속·증여세 최고세율(50%)은 OECD 국가 중 가장 높으며, 경영권 프리미엄으로 최대 20% 할증까지 붙는다.
김 변호사는 “예를 들어 압구정 일대 100억 원대 아파트를 상속하면 각종 공제를 감안해도 수십억 원대 상속세가 발생할 수 있다. 단순 계산으로는 ‘절반 가까이 세금으로 나간다’는 공포를 체감하는 수준이다”고 했다. 반면 미국은 공제액이 매우 커 대부분 상속세를 낼 필요가 없다. 싱가포르·홍콩은 아예 상속세가 없다.
원화 약세는 자산가에게 부동산 가격 변동보다 더 직접적이고 빠르게 타격을 준다. “원화 자산만 보유하면 환율 변동으로 자산가치가 단기간에도 몇 퍼센트씩 빠르게 출렁이는 체감을 받는다. 환율이 1500원을 위협하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달러 자산 필요성이 폭발적으로 커졌다.”
관세전쟁, 공급망 재편, 보호무역 강화는 수출 중심 경제인 한국을 직접 흔든다. 김 변호사는 “달러 자산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격차가 위기 상황에서 극적으로 벌어진다”고 분석했다.
한국 고령층의 은퇴 패턴은 지난 10년 사이 완전히 바뀌었다. “예전에는 제주도로 가는 게 유행이었다면, 지금은 고소득층을 중심으로 아예 해외를 노후 1차 거주지로 설정하는 추세다. 태국·하와이·캘리포니아 등이 대표적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해외 자산 수요 확대로 이어진다.” 그는 이 흐름을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장기적 구조 변화”라고 해석했다.
“달러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간극”
은퇴의 풍경이 바뀌었다…제주에서 해외 1차 거주지로
‘초부자’의 선택지가 아니라 중산층의 옵션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김 변호사는 미국 진출이 더 이상 소수의 ‘초고액자산가’만의 선택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지금까지는 자산가나 대기업 오너 위주로 미국을 고려해왔다면, 앞으로는 중소사업가·전문직 종사자·조기유학을 고민하는 일반 가정까지 폭넓게 미국을 현실적 옵션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는 그런 분들이 불필요한 위험 없이 미국 시장을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만들고 싶다.”
그는 “달러 자산 확보, 자녀 교육, 사업 확장 등 미국이 제공하는 기회는 자산 규모에 따라 차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며 “누구든 준비만 되어 있다면 미국은 충분히 도전 가능한 시장이고, 저는 그 과정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이건 단발성 이민 붐이 아니다. 상속세·환율·지정학·노후·교육까지 모든 요인이 한 방향을 가리킨다. 한국 자산가들에게 미국은 ‘대체지’가 아니라 ‘리스크 분산의 안전판’이다.” 그는 특히 한국 자산가들의 월등히 높은 정보력과 빠른 판단 속도를 강조했다.
“한국인들은 글로벌 금융 환경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집단 중 하나다. 지금 일어나는 흐름은 앞으로 10~20년간 더 심화될 것이다.”
후원하기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좋아요
감동이에요
화나요
슬퍼요
추천해요0
좋아요0
감동이에요0
화나요0
슬퍼요0
기사제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