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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볼리비아가 17일(현지시간) 큰 혼란 없이 대선 투표를 마쳤다고 로이터·AP 등 외신들이 보도했다. 원주민·유럽인·메스티소(혼혈) 등 다인종 인구 1200만여 명의 내륙국 볼리비아는 반미·친중의 이 지역 교두보이자 직전 대선 때 부정선거로 큰 혼란을 겪었던 곳이다. 개혁·반부패 이미지의 중도 우파 로드리고 파스(기독민주당)가 예상을 깨고 선두(약 33%), 친시장·긴축재정을 주장해 온 호르헤 키로가(별명 ‘투토’) 전 대통령이 약 27%로 2위에 올라 10월19일 결선 투표에서 맞붙게 됐다.
그간 유력시되던 사업가 사무엘 도리아 메디나(연합당)은 약 20%로 3위에 그쳤으나 즉각 ‘파스 지지’를 선언하고 나섰다. 반면 집권당 후보인 에두아르도 델 카스티요는 약 3.2%라는 최악의 성적이었다. 일찍부터 외신들은 경제 불안에 지친 유권자들이 20년간 집권한 좌파에 등을 돌리면서 정권 교체가 이뤄질 가능성을 전망다. 각종 여론조사에선 기업가 출신 정치인인 사무엘 도리아 메디나(66)와 호르헤 키로가(65) 전 대통령이 선두권을 형성해 왔다.
현지 일간 엘데베르에 따르면 현지 최고층 빌딩(라파스 소재 그린타워) 소유주인 메디나는 몇 차례 선거에서 사회주의운동당(MAS)의 후안 에보 모랄레스에게 패했다. 모랄레스 정부 시절 자기 시멘트 회사 지분을 몰수 당할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2001년 당시 부통령이었던 키로가는 암 투병으로 물러난 우고 반세르 대통령의 1년여 잔여임기를 수행한 바 있으나 2005·2014·2020년 대선에서 모랄레스와 루이스 아르세(61) 현 대통령 등 좌파 지지세에 매번 밀렸다.
20년 좌파 정권에 대한 피로와 경제 위기가 작용한 가운데 유권자의 4분의1이 부동층이었다고 전해진다. 볼리비아 선거법상 과반 득표 내지 2위 후보와 10%p 이상 격차를 내면서 40% 이상 득표한 후보가 없으면 1·2위 간 결선 투표를 치뤄야 한다. 집권당인 MAS 지지율이 10% 전후까지 크게 하락했으며 당내 계파 갈등으로 실제 득표율 3%대라는 초유의 기록을 냈다.
5월 헌법재판소로부터 모랄레스 4선 출마 불가 판단이 나오자 ‘에비스타’(에보 모랄레스 이름에서 유래한 팬덤 명칭)가 격렬히 반발했고 아레스 대통령 사임 요구 시위를 벌였다. 무엇보다 무효표를 위한 ‘백지 투표’ 운동이 주효했다. 볼리비아 첫 원주민 출신 대통령이었던 모랄레스의 호소로 이번 선거에서 약 20%에 육박한 역대 최대 무효표가 나왔다. 선거판 자체를 뒤흔든 전략이었다고 풀이된다. MAS 표 결집력이 깨져 사실상 우파 후보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지만 당내 모랄레스파 영향력은 변함 없다고 평가된다.
10월 결선 투표에서 누가 이기든 국제통화기금(IMF) 협상 및 시장 친화적인 정책 도입이 추진될 터라 시장에선 이미 정권 교체 전환에 긍정적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점을 로이터가 분석했다. 볼리비아는 아르헨티나·칠레와 함께 ‘리튬 삼각지대’로 불릴 만큼 풍부한 광물 자원 보유국이다. 우유·소금 호수 같은 관광지도 여러 개 있다. 다만 정부의 무리한 국책사업 남발과 통화정책 실패에 따른 중앙은행의 달러 부족, 관료 부패, 은행업계의 도덕적 해이 등 최근 수년 동안 경제 난맥상이 반복적으로 드러난 바 있다.
이번 대선을 둘러싸고 ‘좌파정권 종말’ 측면이 집중 지적되지만 더 중요한 점은 MAS 내부 분열의 심각성이다. 아르세·모랄레스 간 갈등이 지역사회와 농민 기반까지 양분시키는 수준으로 확대됐다. 스페인어권 매체 엘파이스에선 이들 간 긴장이 이번 선거를 넘어 사회·정치 안정성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짚었다. 2024년 6월26일 군사 쿠데타 시도 또한 볼리비아의 정치 위기를 여실히 보여줬다. ‘(현 아레스 정권의) 자작극’ ‘모랄레스 측이 정치적으로 이용’ 등 견해가 분분하다.
가디언에선 앞서 모랄레스를 위한 ‘무효표’가 실제 어떤 계층이 어떻게 반응할지 살피며 향후 정치 참여 양상 변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남미 국가들 중 원주민 인구 비율 최고인 볼리비아의 경우 2000년대 초반엔 60% 이상이 자신을 원주민으로 인식했으나 점차 줄어 최근 학계나 국제기구에선 50% 전후로 추정한다. MAS 소속으로 13년9개월간(2006년 1월22일~2019년 11월10일) 대통령을 지낸 모랄레스는 스페인에 정복된 지 470년 만의 첫 원주민 국가 원수였다.
원래 코카 재배업자였인 모랄레스와 미국 정부의 오랜 대립 역시 볼리비아 미래를 어둡게 했다. 코카란 의료·의류제조용 식물이지만 정제법에 따라 불법마약 코카인이 될 수 있어 미국은 이를 막고자 했으나 볼리비아 ‘코카 재배자 조합’ 지도자이기도 한 모랄레스의 저항이 이어졌다. 그의 토지개혁과 천연가스 수입 재분배 등으로 더 많은 권력을 원주민·빈민 등 사회적 약자에게 돌려주고자 한 정책이 국내에선 지지를 받았으나 볼리비아는 여전히 베네수엘라에 이어 남미 최빈국이다.
2005년 12월 대선 때 53.7%를 득표한 모랄레스가 2년 반 뒤 국민소환 선거에선 67.4% 지지율로 직위를 유지한 이래 권력을 강화하더니 헌법적 제한을 뚫고 삼선(2009·2014년)에 성공했다. 2019년 10월 대선에선 미주기구 감사에서 선거무결성을 의심한 초기 보고서가 나오자 군부와 경찰이 모랄레스 사임을 요구했으며 전국적 시위 사태 속에 해외 망명했다가 같은 당의 아르세가 2020년 당선돼 귀국할 수 있었다.
귀국 후 정치 행보를 이어 오던 모랄레스는 아르세와의 관계마저 파국을 맞아 현재에 이르렀다. 미국에선 아직 공식 반응이 없다. 도널드 트럼프 첫 임기 시절인 2019년 10월 볼리비아 대선에서 모랄레스가 4선에 나섰다가 부정선거 의혹 아래 대규모 시위와 군·경 압박으로 사임했을 때 백악관 성명을 통해 이를 환영하면서 “서반구 민주주의가 지켜진 역사적 순간” “베네수엘라·니카라과에도 교훈이 될 것”이라고 논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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