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파간다가 제거된 잔잔한 글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지식 자랑으로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일도 없어 그런 책을 만나면 시간을 내서 읽곤 한다.
어느 은퇴한 의사가 쓴 수필집이었다. 그 의사분의 아내는 식물과 동물을 사랑해서 길을 가다 큰 나무가 있으면 안아 주기도 하고 베란다에는 새들이 날아와 쉬도록 물과 먹이를 준비해 주기도 했다. 선한 부부의 모습을 상상하니 흐뭇한 기분이 되었다. 참 좋은 사람들이구나 싶었다.
그러면서 나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내 어머니는 이런 삶이 있다는 것을 알까. 길가 나무를 꼭 껴안아 주고 산새에게 먹이와 물을 준비해 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까. 어머니의 삶은 더할 수 없이 간명했다. 오늘 하루 자식들 굶기지 않고 뜨뜻한 방 안에서 새끼들 재우면 그만이었다.
동동거리며 살아온 사람은 그 관성 때문에 나이가 들어서도 맘 편히 쉬지 못하는 법이다. 어머니는 식물을 사랑하지만 농약을 치지 않은 배추와 토마토를 사랑한다. 산비탈 땅을 세내 봄부터 여름까지 식물을 길러 자식도 주고 이웃도 나누어 준다. 하지만 나무를 안아 줄 여유는 없다.
어머니는 동물을 사랑한다. 하지만 유기농으로 키운 소와 닭을 사랑할 뿐이다. 어디서 무얼 먹고 자랐는지 신원이 파악되지 않은 고기는 쳐다 보지도 않는다. 엄마는 좋은 재료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사람들과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산새들에게 물과 먹이를 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다.
어머니에게 ‘나무도 안아 보고 새들 물도 줘 보라’고 하면 화를 낼 것이다. 그런 ‘뻘짓’은 아침에 일어나 남편과 자식들을 일터와 학교로 보내고 느긋하게 차 한잔을 한 뒤 청소와 빨래를 하고 친구들을 만나고 공연을 보고 문화센터에 다니고 저녁 장을 봐서 밥을 차리는 여유로운 사람들의 것이라고. 자신은 그런 삶을 살아 보지 못했다고….

어머니를 설득시킬 자신은 없다. 하지만 나 혼자 깨닫는 게 있다. 고결한 삶은 여유 있게 살아온 사람이 여전히 여유 있게 사는 게 아니다. 숨 가쁘게 살아온 사람이 여전히 숨 가쁘게 사는 게 아니다.
평생 앞만 보고 달려왔지만 속도에 매몰되지 않고, 삶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기꺼이 나무를 안아 주는 것이다. “한자리에서 꿋꿋하게 버티느라 수고했다….” 나무를 쓰다듬는 여유를 갖는 것이다. 안다. 어머니가 그것을 모르는 게, 그 일을 못 하는 게 어머니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그냥 나 혼자 억울한 것이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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