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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8·15광복 이후 정부 수립, 6·25전쟁과 빛나는 산업화 시기를 거쳐 대한민국은 오늘에 이르렀다. 격동의 한반도, 美CIA 요원으로 그 한복판에서 활약한 마이클 이 박사의 숨 막히는 체험…. 북한 정권의 실체와 광주5·18 등 좌경 친북세력이 주도한 사건들에 관한 증언과 분석,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소용돌이 속 한반도의 미래에 관한 그의 이야기들이 값지다. 이에 美연방정부 공무원으로 살아온 40년 세월을 담은 그의 저서 ‘CIA와 대한민국’을 지면에 연재한다.
힘겨운 육체노동
백화점 점원이란 참으로 고달픈 직업이었다. 오전에 15분 휴식, 오후에 15분 휴식, 그리고 30분간의 점심시간 외에는 하루 종일 서서 일해야 하고 어떤 날은 8시간 혹은 12시간을 일해야 했다. 오랫동안 육체노동을 해 본 일이 없는 내게는 그 일이 참으로 힘에 겨웠다.
이런 일이나 하려고 이민을 왔나 싶어 서글프기도 했지만 주위를 돌아보니 육군 대령 출신이 주유소에서 일하고 대학교수 출신이 세차장에서 일을 하기도 하는데 그래도 내 처지는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물건이나 파는 점원 노릇으로 세월을 보내기에는 나의 경험이나 능력이 아깝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래도 참고 기회를 기다리자 마음을 다잡고 하루하루 열심히 일했다.
그 사이 나는 가족을 미국으로 불러 함께 살고 있었다. 백화점 점원으로 자리 잡고 일하게 되자 가장 먼저 직장 근처에 아파트를 구했다. 서울에 있는 가족을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정월에 내 가족도 미국으로 건너왔다. 본격적인 이민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백화점 점원으로 일하고 아내는 세탁소에서 옷 수선하는 일을 했다. 아내도 아이들도 낯설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모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래도 가족이 함께 있으니 마음이 훈훈해지고 의지가 됐다.
CIA 국장 부시에게 편지를 보내다
K-Mart 백화점에 입사하여 2년이 다 되어갈 무렵, 나는 몸과 마음이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느끼고 있었다. 사람이 극한 상황에 빠지면 극한투쟁을 하게 되어 있다. 쥐도 급하면 고양이를 문다는 말이 그래서 생겨났을 것이다. 하루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K-Mart 백화점에서 99달러짜리 스미스 코로나 타자기를 하나 사들고 퇴근을 했다. 그리고 편지를 썼다. 당시 미국의 모든 국가 정보기관의 총수인 미국 중앙정보국의 조지 부시(George H. W. Bush·훗날 미국의 제41대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호소의 편지였다.
나는 먼저 나 자신을 소개한 다음 내가 서울에 있는 미 502군사정보단에서 무슨 일을 했으며 미국 정부를 위해 얼마나 애썼는가를 얘기했다. 현재는 미국에 이민을 왔으나 아직 시민권이 없는 관계로 나의 능력과 경험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직장에서는 받아 주지 않아 백화점에서 물건을 파는 영업사원으로 일하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인적자원의 낭비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것은 마치 보석세공사를 채석장에 보내 일하게 하는 것과 같은 처사이며 미국 정부의 실책이라고 떼를 썼다. 그러고는 내 사진과 그동안 받은 표창장·감사장 등을 첨부해 다음 날 우체국에 가서 특별등기우편물로 발송했다.
그날이 1976년 3월3일이었다. 나는 그 편지를 조지 부시뿐 아니라 하나님도 반드시 읽게 되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그리고 약 3주가 지났다. 하루는 백화점에서 퇴근해서 저녁을 먹고 있는데 어딘가에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자 상대가 내게 이름이 마이클인지, 얼마 전에 조지 부시 국장에게 편지를 보낸 사실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상대는 내게 오는 수요일 오후 1시에 로슬린(Rosslyn)에 있는 매리어트 호텔 로비로 나오라고 했다. 세상에 이런 일이!
홧김에 허공을 향해 쏘아올린 나의 화살이 포토맥 강 넘어 랭글리(Langley)에 있는 CIA 본부 8층, 조지 부시의 책상 위로 떨어진 것이다. 그날 밤은 설레는 마음으로 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다.
수요일이 되어 약속된 장소로 나가니 CIA 본부에서 나온 간부 세 명이 미리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여러 가지를 질문하면서 대화 중에 이런 말을 했다. 부시 국장이 내 편지를 직접 읽었으며 동아시아 공작처장에게 서둘러서 나를 만나 보라고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었다.
내가 합당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면 시민권이 없어도 채용할 계획인데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며, 동아시아 공작처에서는 마침 나와 같은 인재를 찾고 있던 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일련의 수속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제일 먼저 필기시험을 봐야 한다고 했다. 그런 다음 약 6개월간의 신원조회를 거쳐야 하며 신체검사와 성격·적성검사를 통과해야 한다고 했다.
설명을 마치자 그들은 나를 데리고 빈방으로 가서 한 시간 동안 필기시험을 치르게 했다. 만약 내가 그 시험에 합격하면 미국의 행정고시와 외무고시 합격에 준하는 것으로 인정을 받게 되며 CIA 입사 수속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했다.
필기시험 합격
이틀 후, 그들 중 한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가 필기시험에 합격했다는 통보였다. 나는 너무나 기뻤다. 그러나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을 못하고 아내에게만 살짝 귀띔했다. 그러고도 6개월간의 신원조회를 기다려야 하는데 초조하기도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잘 진행될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2개월 만에 신원조회가 끝났다는 연락이 왔다. 그리고 며칠 후 로슬린에 있는 모 병원에 가서 신체검사를 받았다. 그러나 세상사는 언제나 순풍에 돛 달고 나아가듯 진행되는 법이 없다. 일이 순조롭게 잘 풀리려나 싶으면 반드시 장애물이 나타나고 걸림돌이 도처에 깔려 있다. 신체검사를 받고 온 지 2주일이 지났는데 병원으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마음이 초조해져서 담당 의사에게 전화를 해 보니 나의 입사가 취소되었다는 것이었다. 무엇 때문이냐고 물으니 미국의 연방정부는 절대로 고혈압 환자를 채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칼로 잘라 내듯 냉담한 말투였다. 참으로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하지만 거기서 좌절할 내가 아니었다. 이 세상에는 우는 아이에게 젖을 주는 두 분이 계시다. 하나님과 어머니다.
나는 담당 의사에게 항의를 했다. 이 일은 반드시 하나님이 알아서 처리하실 것이란 믿음을 갖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처음부터 고혈압 환자가 아니다. 세상에 낯선 땅에 이민 와서 2년 동안이나 백화점에서 중노동을 하고 혈압이 안 올라간다면 거짓말이다. 내가 입사하면 분명히 며칠 사이에 혈압이 정상으로 떨어질 것인데, 사람을 여기까지 띄워 놓고 나 같은 인재를 그따위 혈압 때문에 내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고용계약서 서명
이 말을 들은 담당 의사는 껄껄 웃으며 “세상에 당신처럼 뻔뻔한 인간은 처음 보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체하지 말고 주치의를 찾아가서 앞으로 그가 나의 건강 문제를 계속 관리할 것이라는 내용의 서류를 작성하고 서명해서 자신에게 우송하라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다음 날 내 주치의인 임응순 박사를 찾아갔다. 임 박사는 “앞으로도 마이클의 건강을 책임지고 관리하겠다(Michael is and will be under my medical attention)”고 쓴 서류에 서명을 해 주었고 나는 그 서류를 즉시 우편으로 보냈다.
며칠 후에 CIA 본부로부터 전화가 왔다. 로슬린에 있는 매리어트 호텔 로비로 다시 나오라는 기별이었다. 드디어 모든 일이 뜻대로 잘되어 가는구나 싶어 나는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그날이 1976년 6월7일이었다.
매리어트 호텔에는 내가 처음 만났던 그 세 사람이 또 나와 있었다. 그들은 가져온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손을 내밀며 “축하합니다. 그리고 환영해요.”라고 말했다. 입사를 축하한다는 인사였다. 나는 그때의 감격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서류에 있는 행정 규정과 보안 규정을 정독하고 고용계약서에 서명을 한 다음 우리들은 또 한 번 악수를 나누었다. 그 자리에서 그들이 말했다.
“이 순간부터 자네는 연방정부 공무원이다.”
프로필
△ 美 연방정부 40년 근속
(DIA(Defense Intelligence Agency·국방정보국) 16년·CIA(중앙정보국) 24년)
△ 1976년 미국 외무고시 합격
△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정치학 박사
△ 美 국무성 동아시아 문제 수석연구원
△ 美 국무성 외교연수원 교수
△ 주한 미국대사관 정무관
△ CIA 한·미 안보협력 조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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