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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8·15광복 이후 정부 수립, 6·25전쟁과 빛나는 산업화 시기를 거쳐 대한민국은 오늘에 이르렀다. 격동의 한반도, 美CIA 요원으로 그 한복판에서 활약한 마이클 이 박사의 숨 막히는 체험…. 북한 정권의 실체와 광주5·18 등 좌경 친북세력이 주도한 사건들에 관한 증언과 분석,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소용돌이 속 한반도의 미래에 관한 그의 이야기들이 값지다. 이에 美연방정부 공무원으로 살아온 40년 세월을 담은 그의 저서 ‘대한민국과 CIA’를 지면에 연재한다.
무장 간첩 김동기
15년 이상 심문관 생활을 하면서 하도 많은 일들이 있었던 터라 그 수많은 일들을 다 기억할 수도 없다. 그래서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사건들을 추려서 더 이야기해 볼까 한다.
1966년 5월17일에 3인조 북한 무장간첩이 그 당시 경남 진양군 금산면 장사리에 나타났다. 신고를 받은 진주 경찰서는 6명의 경찰특공대를 투입하여 그들을 체포하려고 했으나 총격전이 벌어져 3인조 중 유경태는 사살되고 심한 총상을 입은 김동기는 생포되었으나 정상규는 도주했는데, 그 직후 긴급 출동한 39사단 병력에 의해 진성면 대사리에서 그도 사살되었다. 이때 경찰 측에서는 순경 이형이 전사했다.
생포된 김동기는 대방동 수용소로 후송되었고 내가 그를 담당한 심문관이 되었다. 그는 목발을 짚고서도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하체에 심한 부상을 입어서 나는 약 한 달간 그를 데리고 병원에 다녔고 그 후로는 일주일에 두 번씩 두 달간 물리치료를 받게 했다. 그를 심문하는 일은 아주 힘들었다. 그가 비협조적이었으며 여차하면 묵비권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그해 가을이었다. 하루는 퇴근해서 집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부대에서 급히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부대에 들어가 보니 김동기가 말썽을 부리고 있었다. 피심문자로 취조를 받고 있는 김동기가 신발짝으로 미국 헌병의 따귀를 때렸다고 했다. 나는 수용소에 들어가 그를 만나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물어보았다. 그러자 김동기가 울면서 털어놓았다.
남파될 무렵 김동기는 북에서 상업성 상급지도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노동당에 소환되어 대남공작원으로 교육을 받았는데 그때 그는 결혼한 지 두 달밖에 안 된 새신랑이었다. 그는 노동당에 소환된 그날 이후 두 번 다시 젊은 아내를 만나지 못한 채 그대로 남파되었는데 고아 출신인 그녀를 생각하면 너무나 애처롭다고 했다. 당이고 조국이고 모두 다 원망스럽기만 하며 매사에 반항심만 생긴다는 것이었다.
마침 그날은 아내의 생일이라 그녀가 보고 싶어서 밖에 나가 달이라도 보겠다고 했다가 사달이 난 것이었다. 밖에 나가겠다는 그를 수용소 경비를 담당한 미군 헌병들이 저지하는 바람에 충돌이 생겼고 화가 난 그가 신고 있던 고무신을 벗어서 헌병의 따귀를 때린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그가 남한을 해치려고 침투한 무장간첩이란 생각을 넘어서 그가 너무도 안쓰러웠다. 그래서 나는 그의 두 손을 꼭 쥐고 함께 펑펑 울었다. 이것이 바로 민족 분단의 비극이다. 나는 그를 달래고 위로한 다음에 다시 귀가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출근해서 정상적으로 심문 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김동기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자신이 그동안 말하지 못한 것이 너무 많다면서 자진해서 술술 진술을 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나는 그가 출소할 때까지 힘들이지 않고 엄청난 분량의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인데, 김대중정부가 2000년 9월2일에 63명의 비전향장기수(간첩 출신 46명·빨치산 출신 17명)를 북으로 송환할 때 김동기가 거기 끼어 있었다. 비전향장기수란 간첩으로 침투하거나 남쪽에 머물며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심문·복역 과정에서 회유와 협박, 때로는 고문에도 전향하지 않고 공산주의 사상을 고집하며 오랜 기간 복역한 죄수들을 일컫는다. 그들이 그렇게 전향하지 않고 버틴 것은 대개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의 안위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남한에서 34년을 복역했다. 그가 북으로 돌아가 오랫동안 헤어졌던 아내와 재회를 했는지 궁금하다.
고랑포 기습 사건
정확한 날짜를 기억할 순 없지만 그때가 아마도 1966년 늦가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서부전선 미2사단 전방으로 침투했다가 체포된 간첩 한 사람을 내가 심문하게 됐는데 심문 중에 그가 한 가지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줬다.
그 당시 북한 인민군은 동부전선에 제1집단군, 중부전선에 제5집단군, 그리고 서부전선에 제2집단군을 배치하고 있었는데 각 집단군 산하에는 총참모부 정찰국의 작전 지시를 받는 도보정찰소(徒步偵察所)라고 하는 특공대가 있었다.
이 도보정찰소는 아군, 즉 국군과 미군 전방에 은밀 침투하여 정찰 활동을 하거나 때로는 밤에 전방 부대의 지휘관을 암살하고 목을 베어 가는 공작을 수시로 자행했다. 그해 10월15일부터 20일 동안 그들이 집중적으로 동부전선·중부전선·서부전선 일대에서 남으로 침투하여 국군 장병 총 23명을 사살하고 1명을 납치했으며 여러 명이 부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그 당시 전방의 경비가 허술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중요한 정보란 이런 것이었다. 그 당시 제2집단군 산하 도보정찰소에서는 1개 소대 병력이 맹훈련 중이었는데 그들의 임무는 미(美) 2사단 전방에 침투하여 미군 부대를 기습하고 병력을 사살한 후 퇴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마도 1개월 이내에 작전을 개시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내용을 급히 긴급첩보 형식으로 작성하여 보고했다.
아니나 다를까 1966년 11월2일 새벽에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에서 800m 떨어진 미2사단 소속 고랑포 부근 일개 부대가 저들의 기습을 받았다. 북한 인민군 도보정찰소 산하 부대의 뜻하지 않은 기습으로 아침식사 배급 대열에 서 있던 미군 6명과 카투사 1명이 사살되고 미군 1명이 심한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미8군과 제2사단이 비상 태세에 들어갔다. 내가 보고한 정보를 신속히 처리하고 경계 태세를 철통같이 했더라면 그런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무장지대 부근 고랑포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부대가 남쪽으로 침투해 온 북한 인민군 특공대의 기습을 받아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었다. ‘고랑포 기습 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휴전 이후 미군이 북한에 당한 가장 큰 사건이었다.
마침 당시 방한 중이던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이 사건을 보고받았다. 존슨 대통령은 UN군 사령관이며 미8군 사령관인 찰스 본스틸 대장에게 사건의 책임을 엄격히 가려 처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런데 그 불똥이 나에게 튀었다. 미8군 G-2에서 502군사정보단을 검열하고 사전 정보가 있었는지의 여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내가 보고한 심문조서가 발견된 것이다. 분명히 사전 정보가 있었는데 사건 발생 이전에 처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었고 본스틸 대장이 노발대발하기에 이르렀다. 본스틸 대장은 직접 진두에 나서서 진상을 밝히기 위해 502군사정보단과 내가 속해 있는 A중대에 찾아와 책임을 추궁하게 되었는데 맨 마지막에 내가 불려 들어갔다.
부대 지휘관들이 모두 벌벌 떨었고 나도 별 넷을 단 사성(四星)장군 앞에서 벌벌 떨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머릿속으로 번개처럼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심문조서 첫 페이지에 빨간 글씨로 표시를 해 둔 것이 기억난 것이었다.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내가 작성한 심문조서의 원본을 찾아 달라고 했다. 장교 한 사람이 부대 편집과에 가서 원본을 찾아와 본스틸 대장에게 건넸다. 원본을 받아 든 본스틸 대장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심문조서 원본의 첫 페이지에 분명히 빨간 글씨로 긴급처리 요망(Immediate Action Required)이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오히려 칭찬을 받았고 상부의 여러 사람이 징계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이때 이후로 긴급첩보 보고 절차(Spot Report System)라는 게 새로 시작되었다. 내가 작성한 심문조서의 ‘긴급처리 요망’이라는 빨간 글씨를 무심코 넘긴 일로 된통 혼이 난 이후 특별히 내가 새로운 입소자를 심문하기 시작했다 하면 부대장과 편집과 직원들이 바짝 긴장을 하는 우습지만 웃을 수 없는 장면도 연출됐다.
프로필
△ 美 연방정부 40년 근속
(DIA(Defense Intelligence Agency·국방정보국) 16년·CIA(중앙정보국) 24년)
△ 1976년 미국 외무고시 합격
△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정치학 박사
△ 美 국무성 동아시아 문제 수석연구원
△ 美 국무성 외교연수원 교수
△ 주한 미국대사관 정무관
△ CIA 한·미 안보협력 조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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