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쓰는 역사 [38] 핵 반대 운동의 상징이 된 해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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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씨는 우크라이나 경제의 핵심 요소

스카이데일리 기자페이지 + 입력 2024-11-25 14:32:56

▲ 18세기 중반 우크라이나에 들어온 해바라기는 우크라이나 경제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 윤상구 사진작가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빗(碑)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함형수 시인의 ‘해바라기의 비명(碑銘)-청년 화가 L을 위하여’라는 작품 중 일부다. 태양을 향해 둥근 얼굴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선 해바라기를 묘지와 연결 지은 것은 이 시뿐만이 아니다. 1970년 발표된 이탈리나 영화 ‘해바라기’에 등장한 광활한 해바라기밭은 전쟁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공동묘지로 설정되기도 했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 지오바나(소피아 로렌)의 남편 안토니오(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는 징집되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살아 돌아온 동료 병사로부터 안토니오가 돈강 근처에서 낙오했다는 말을 들은 지오바나는 남편을 찾아 소련으로의 험난한 여정을 시작한다.

전쟁 중 희생된 사람들 시신 위에 선 해바라기

이탈리아는 나치 독일·일본 제국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추축국 중 하나다. 그때 연합국의 일원이던 소련은 이탈리아의 적국이었고 두 나라 군대는 우크라이나 즈음에서 부딪히게 된 것이다.

우크라이나로 추정되는 지역의 끝없이 펼쳐진 해바라기밭에 당도한 지오바나에게 지역 주민이 귀띔했다.

“독일군은 저 해바라기밭 아래 포로들이 직접 자기 무덤을 파게 했어요. 해바라기들은 모두 군인들과 민간인들의 시신 위에 서 있는 거예요. 당신 남편도 아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저 해바라기 아래 묻혔을 거예요.”

해바라기는 우크라이나 국화(國花)다. 18세기 중반에 원산지 남미로부터 들어온 해바라기는 우크라이나 경제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 전쟁 전 우크라이나는 해바라기씨 기름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하고 수출하는 나라였다.

1986년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 사고 후, 과학자들은 오염된 토양에서 방사성 원소인 세슘과 스트론튬 성분을 제거하기 위해 해바라기를 심었다. 해바라기는 토양 속 방사성 물질을 흡수하여 농축하는 능력이 탁월한 식물이라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토양 속 방사성 물질을 흡수하여 농축하는 식물

▲ 해바라기는 토양 속 방사성 물질을 흡수하여 농축하는 능력이 탁월한 식물이다. 윤상구 사진작가

핵 위험성을 그 누구보다 뼈저리게 겪은 우크라이나는 소련으로부터 물려받은 핵무기를 1996년 포기하였다. 그때 우크라이나, 러시아, 미국 등 3개국 국방부 장관은 핵 포기 기념식 장소에 해바라기를 심었다. 핵 물질을 제거하는 해바라기가 핵 반대 운동의 상징이 된 것이다.

한때 소련이라는 하나의 나라로 묶여 있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악연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도 장소가 우크라이나였을 뿐 시작부터 뒤처리까지의 잘못과 책임은 모두 모스크바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보다 앞서 1932~1933년에 일어난 대기근 홀로도모르는 소련 정부의 대량 살인이라고까지 불리는 참혹한 사건이었다.

홀로도모르의 ‘홀로도(Holodo)’는 기아, ‘모르(mor)’는 대규모 죽음을 뜻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와 거의 맞먹는 크기의,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토양 중 하나인 체르노젬(검은 흙)을 지닌 우크라이나가 대기근을 겪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1932년에 흉년이 든 것도 아니었다.

1930년대 초, 소련은 개인 소유의 농지를 국가가 관리하는 대규모 농장으로 통합하는 작업을 강제로 시행했다. 조상 대대로 개인 땅을 경작해온 우크라이나 농민들은 극심하게 반대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반대하는 농민들을 ‘쿨라크(부농)’로 몰아 탄압했고 곡물을 대량 수출하여 산업화 자금을 마련하고자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된 곡물을 몰수했다.

계속되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악연

우크라이나 농민들은 자신들의 식량도 미처 챙기지 못한 채 곡물을 다 빼앗겼다.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식량 부족 사태가 일어났지만 정부는 주민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을 금지했고 저항하는 사람은 무참히 살해했다. 비옥한 땅과 풍성한 작물이 오히려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굶주림과 죽음의 화근이 된 것이다.

홀로도모르 기간 우크라이나인 약 700만 명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이를 ‘대량 학살’이라 주장하는 역사학자들은 저항하는 우크라이나 주민들을 소련 정부가 의도적으로 굶겨 죽였다고 보는 것이다. 현재 우크라이나 대도시마다 홀로도모르 추모비가 세워져 있고 매년 11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는 창가에 촛불을 켜놓고 희생자들을 추모한다고 한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2022년 2월 24일, 항구 도시 헤니체스크에서 한 우크라이나 할머니가 중무장한 러시아 군인을 향해 호통치는 영상이 전 세계로 퍼져 화제가 되었다. “러시아 놈이 왜 여기 있어? 너희는 파시스트 점령군이야! 주머니에 해바라기 씨나 넣어둬라. 네가 이 땅에 쓰러지면 해바라기가 자랄 테니.” 이 할머니의 절규는 승패와 상관없는 전쟁의 참혹함 그 자체를 통렬하게 꼬집은 듯하다.

[글 황인희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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