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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8·15광복 이후 정부 수립, 6·25전쟁과 빛나는 산업화 시기를 거쳐 대한민국은 오늘에 이르렀다. 격동의 한반도, 美CIA 요원으로 그 한복판에서 활약한 마이클 이 박사의 숨 막히는 체험…. 북한 정권의 실체와 광주5·18 등 좌경 친북세력이 주도한 사건들에 관한 증언과 분석,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소용돌이 속 한반도의 미래에 관한 그의 이야기들이 값지다. 이에 美연방정부 공무원으로 살아온 40년 세월을 담은 그의 저서 ‘대한민국과 CIA’를 지면에 연재한다.
제대 후의 방황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는 하루하루를 달콤하고 아기자기하게 보낼 결혼 초기였지만 우리 부부는 그런 멋있는 신혼생활을 하진 못했다. 내가 영내에 거주하는 사병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에는 영내에 머물면서 근무하고 주말에만 아내에게 갔다. 당시 아내는 서울 중구 필동 2가에 홀로 셋방을 얻어 살면서 그곳에서 선교부에 출퇴근을 했다. 우리는 그렇게 주말부부로 어설프기 짝이 없는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가진 것도 없었고 뒷배도 없이 어렵사리 살아가며 주말에만 서로 얼굴을 볼 수 있는 가난하고 초라한 신혼생활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행복했다. 10살에 아버지를 잃은 후 아무런 의지도 되지 않는 형 밑에서 어머니와 둘이 외롭고 힘들게 살아온 내게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몸과 마음을 기대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하나 생긴 것이었다.
아내는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인지 행동거지며 사고방식이 일본 여자 같았다. 행동거지가 예의 바르고 성품이 조신해서 누구와도 부딪히는 일 없이 있는 듯 없는 듯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언제나 상냥했고 나를 지극히 사랑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일본에서 지내다 와서 그런지 아내는 그때까지도 한국말이 서툴렀는데 그래서 우리는 자주 일본말로 대화를 하곤 했다.
1957년도 다 가고 1958년이 되어서 그해 봄에 아내가 아기를 가졌다. 기쁜 일이었지만 참으로 대책없는 일이기도 했다. 임신을 하자 아내는 시간이 가면서 배가 점점 불러 와 더 이상 선교부에서 근무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군 복무를 계속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내 혼자 해산을 위해 충남 부여에 있는 친정집으로 내려갔다.
그러다가 그해 5월15일 나에게 의가사(依家事) 제대 명령이 떨어졌다. 그리고 이어서 5월26일에 엄마를 닮아 예쁘고 아빠를 닮아 눈이 초롱초롱한 딸, 우리의 첫아기가 태어났다. 우리는 서울에서 맺은 열매라는 뜻에서 아기 이름을 경실(京實)이라고 지었다. 나는 기쁘고 행복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에 커다란 돌덩이가 하나 얹힌 듯 답답하고 불안했다. 이제 책임이 무거운 남편이자 아빠가 되었는데 막상 군에서 제대를 하고 나니 생활 대책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우리나라는 경제 상황이 너무 안 좋아서 일자리를 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보다 힘들었다. 나는 군에서 제대를 하고 첫아기가 태어났다는 소식에 곧바로 아내가 있는 부여에 내려가 잠시 머물렀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일자리를 찾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서울에 올라와 여기저기 헤매고 다니며 일자리를 구해 보았지만 모두 허탕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아는 사람의 소개로 임시로 머물 곳을 찾은 것이었다.
지금은 다 없어졌지만 당시 수색 앞쪽으로 한강 가운데에 배를 타고 들어가는 ‘난지도’라는 섬이 있었다. 그리고 그 섬 안에 서울 YMCA에서 운영하는 ‘Boys Town’이라는 고아원이 있었다. 나는 당분간 이곳에 머물면서 고아원 일을 돌보기로 했다. 고아원 일뿐 아니라 낮에는 고아원에 속해 있는 피마자 밭과 채소 농장에서 일도 했다.
참으로 한심한 처지였다. 결혼을 해서 아내와 어린 딸을 둔 가장이 직업도 없이 고아원에서 허드렛일이나 거들며 빈둥거리고 있었으니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홀로 난지도의 고아원에 머물며 갓 태어난 딸 경실이가 보고 싶을 때는 밤에 몰래 피마자 밭에 들어가 달을 보고 울었다. 아기도 보고 싶었지만 무엇보다 스스로의 처지가 딱하고 한심해 혼자 있을 때면 그저 어느새 눈물이 차오르곤 했다.
뜻밖의 취직
그해 여름에는 비가 엄청나게 많이 왔다. 비가 억수같이 오던 어느 날 나에게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내가 근무하던 대방동 528군사정보대에서 사병 한 사람이 수소문해서 내가 난지도에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온 것이었다. 그 사병의 말에 따르면 528부대장이 한국 근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귀국하면서 나를 급히 찾고 있으니 빨리 가서 만나라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체 없이 대방동으로 달려갔다.
당시에 528부대에서는 미군 장교나 사병들이 언어 문제 때문에 직접 포로들을 심문하지 못했다. 그래서 한국어와 영어에 능숙한 한국인 10여 명을 심문관으로 채용해서 한국군 파견대 장교들과 합동으로 심문 작업을 진행했다. 부대에서는 이 심문관을 CMS(Critical Military Specialist)라고 불렀다. CMS 요원은 미국 시민권은 없었지만 미국 국방성의 예산에서 급여를 받는 연방정부 공무원의 자격을 부여받았다. 월급 이외에 식사도 하루 세끼 미군 식당에서 무료로 제공했다.
그런데 내가 528부대에서 제대하고 난 다음 그 CMS 요원들 중 한 사람의 결원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요원을 공개 채용해야 하는데 본국으로 떠나는 부대장이 상부에서 특별히 승인을 얻어 굳이 나를 그 빈자리에 채용하고 귀국하겠노라고 고집을 피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군에서 제대하기 전 그 부대에서 근무할 때 나를 지켜보았던 모양이다.
나중에 생각해 봐도 이건 참으로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안타까운 처지의 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한 달을 어떻게 기다려
대방동의 528부대로 가자 부대장은 나를 찾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기쁘게 맞아 주었다. 그러고는 즉시 인사 장교를 통해 수속을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영내에서 숙식을 하면서 신원조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약 한 달쯤 지나자 모든 행정 절차가 마무리됐다. 그렇게 나는 고용계약서에 서명을 했고, 1958년 9월19일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취직을 하고 출근하는 날이 정해졌다.
나는 대방동 해군본부 아래 주택가에 셋방 하나를 얻고 영등포 시장에 가서 침구와 주방용품을 샀다. 그리고 출근 전날 밤에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여보, 내가 서울에서 취직이 되었소. 지금부터 한 달이 지나면 첫 월급이 나오니 그때에 맞춰 아기를 데리고 대방동 파출소 뒤 528부대로 나를 찾아오시오. 우리 이제 모든 눈물과 좌절을 뒤로하고 본격적으로 신혼생활을 시작합시다.”
그런데 사흘이 지나서 부대 정문 헌병초소에서 전화가 왔다. 나를 찾아온 면회자가 있다는 것이었다. 급히 내려가 보니 아기를 업은 아내가 와 있었다. 머리에는 보따리 하나를 이고 한 손에 바가지와 빗자루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반갑기보다 어이가 없어서 잠시 할 말을 잊고 멍하니 아내를 바라봤다.
“한 달 후에 오라고 했는데….”
그렇게 중얼거리자 아내는 “한 달을 어떻게 기다려” 하면서 훌쩍훌쩍 울었다.
그날은 일찌감치 조퇴를 하고 대방동에 얻어 놓은 셋방에 아내와 함께 가서 살림살이를 정리했다. 태어난 지 100일이 지난 딸 경실이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빵긋빵긋 웃었다. 나는 이때의 감격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부대에서는 곧바로 미군 소속의 심문관이 되어 심문 활동에 들어갔다. 그리고 6개월 후에는 GS-7급에서 GS-9급으로 승진을 했다. 그러자 동료 심문관들이 나만 너무 승진이 빨랐다며 시기를 했다. GS-9급은 미군의 현역 소위와 대등한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내 나이는 만 25세.
528부대는 얼마 후에 502군사정보단 A중대로 개편되었고 이 부대에서 나는 1974년 5월4일까지 근무했다. 언제나 열과 성을 다해 일했으며 미국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그만큼의 인정도 받았다. 나는 이 모든 일이 하늘의 선한 보살핌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생각한다.
프로필
△ 美 연방정부 40년 근속
(DIA(Defense Intelligence Agency·국방정보국) 16년·CIA(중앙정보국) 24년)
△ 1976년 미국 외무고시 합격
△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정치학 박사
△ 美 국무성 동아시아 문제 수석연구원
△ 美 국무성 외교연수원 교수
△ 주한 미국대사관 정무관
△ CIA 한·미 안보협력 조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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