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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양국이 관세·안보 협상 결과를 ‘공동 설명자료’라는 형태로 명문화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한국의 대규모 대미 투자와 관세 인하라는, 손바뀜이 명확한 합의다. 그러나 종이를 들춰보면 잉크가 마르지 않은 지점들이 수두룩하다. 정부는 “불확실성이 제거됐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불확실성이 문서 속에 정리돼 들어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이번 협상의 핵심 성과로 지목된 핵추진잠수함(핵잠) 건조는 대표적이다. 정부는 '국내 건조'를 언급하지만, 정작 팩트시트에는 이 대목이 없다. 오히려 미 해군참모총장은 “핵잠은 중국 억제를 위해 쓰일 것”이라는, 듣기에 따라선 논란을 부를 발언을 건넸다. 핵잠 논의가 한국의 방위력 강화인지, 미국의 지역전략 보조인지 모호해지는 장면이다.
또 하나의 빈칸은 원자력협정 개정이다. 핵잠 연료 확보를 위해선 우라늄 농축·재처리 권한을 넓혀야 하지만, 팩트시트엔 ‘미국의 법적 요건 충족’이라는 단서를 반복할 뿐이다. 미국의 비확산 정책이 얼마나 견고한 지 알 때, 이 단서가 사실상 “길고 험난할 것”이라는 경고로 들린다.
경제 분야 역시 화려한 숫자 뒤에 숨은 변수가 많다. 3500억달러 투자와 관세 15% 인하라는 줄거리는 명확하지만, 2000억 달러 현금 투자처에 대한 최종 결정권이 미국 대통령에게 있다는 문구는 한국의 ‘선택권’보다 미국의 ‘거부권’이 더 강하게 부각된다. 투자금 납입 지연 시 관세가 다시 인상될 수 있다는 조항도 외환시장 불안 시 한국의 정책 선택지를 묶어두는 족쇄가 될 여지가 있다.
더욱이 팩트시트에는 농산물·LMO 수입, 유튜브·넷플릭스와 같은 비관세장벽 완화까지 포함됐다. 주한미군 330억 달러 지원과 5년 내 250억 달러 미국산 무기 구매라는 ‘신규 비용’도 등장했다. 문서 안에는 이미 상당한 ‘지출 계획’이 흘러넘친다. 이번 합의가 한·미 간 신뢰의 문서라면, 그만큼 한국이 부담해야 할 ‘비용의 문서’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권은 비준·특별법을 두고 각자 다른 북소리를 두드리고 있다. 외교·안보가 정쟁의 도구가 되기 시작하면 협상의 실효성은 쉽게 무너진다. 주한미군 지원, 핵잠 연료 협의, 관세 복원 조건 같은 사안은 여야가 지분을 나눌 문제가 아니라 국가 규모로 풀어야 할 숙제다.
기업과 정부의 ‘원팀’ 강조도 마찬가지다. 대기업 총수들이 일제히 국내 투자 계획을 내놓았지만, 정작 3500억 달러 투자 이행이 본격화하면 국내 산업 기반이 빠져나가는 산업 공동화 우려는 여전히 짙다. 미국의 MASGA 프로젝트, 전력·에너지 인프라 투자는 한국 기업에게 기회이자 함정이다. 미국으로 이동하는 공장, 기술, 인력이 한국에서 메마름을 만들어선 안 된다.
외교는, 특히 경제 안보 협상은, ‘선언’이 아니라 ‘실행’에서 운명이 갈린다. 팩트시트의 진짜 내용은 적힌 문장보다 적히지 않은 문장에서 드러난다. 관세 인하보다 ‘향후 재협상 조건’이, 핵잠 건조보다 ‘표기되지 않은 장소’가 더 많은 이야기들을 말한다.
어쩌면 이재명 대통령이 “이제 시작”이라고 말한 순간이 이번 협상의 가장 솔직한 대목일지 모른다. 지금 이 합의는 종착지가 아니라, 길을 다시 연 출발점이다. 국익을 최대한 지키면서 미국과 긴 협상 터널을 통과해야 하는, 그 지난한 여정이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늘 강대국 사이에서 균형을 배웠고, 선택의 순간마다 고개를 들고 바람의 방향을 읽어 왔다. 이번 팩트시트가 불안의 목록이 아니라 기회의 지도가 되려면, 빈칸을 메우는 힘과 차분함·실리·초당적 협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빈칸에 무엇을 채울지는, 결국 우리 스스로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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