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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숙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입에선 다른 말이 나왔다. “그래 봤자 전쟁광들이죠. 청일전쟁·러일전쟁·태평양 전쟁…. 가쓰라 태프트 조약만 아니었어도 조선이 일본 지배를 받게 되진 않았는데. 미국과 일본 같은 악랄한 제국주의는 몰아내야 해요.”
권지호는 팔베개를 뺐다. 희숙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권지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곤 벽에 걸린 하의를 찾아 입으며 말했다.
“에고, 쯧쯧 금화야, 너 어디 가서 그런 무식한 소리 하고 다니지 마라. 일본을 밀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철저한 사회진화론자였어. 힘이 모든 걸 결정한다고 믿었지. 조선인들 게으르고 무능력하니 일본인들한테 맡기려 한 거야.
조선인들이 얼마나 무지하고 패배 의식에 절었는지 아냐? 일본인들이 패망하고 나니까 등대에 몰려가서 돌로 라이트를 다 때려 부쉈어. 일본인들이 만들었다고 박살 내고는 환호했지. 근데 고기 잡으러 나갔던 어부들이 등대가 없어져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거 아냐. 등대란 등대는 다 깨부수고 망가뜨려서 어디가 땅인지, 어디가 바닷길인지 모르고 물귀신이 됐다는 거 알아? 일본 잔재 지운다고 죄다 불태우고 모조리 깨부수고. 그러곤 만세 불렀지.”
희숙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등대를 깨부수어 고기 잡으러 나갔던 어부들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객귀가 되었다니. 설마 지어낸 얘기는 아니겠지? 희숙은 부르주아 권지호가 일본을 드나들더니 일본이 만들어 내 떠드는 말을 믿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일본 기술로 만든 거 보존한 뒤 어떻게 만들었는지 연구해서 쓸 생각은 안 하고 말이야. 조선이 돛단배 띄울 때 일본은 항공모함 만들었어. 지주 몰아내고 재산 빼앗고 전답 차지하면 진짜 이긴 것 같지? 그게 노예근성이야. 수백 년 조선을 이어 내려온 노예근성. 지주의 생각을 읽을 줄 알아야지.
루스벨트의 안목이 제대로였던 거야. 일본은 주인의식, 조선은 노예근성. 그러니까 힘을 갖는 건 찬성할 일이야. 힘을 가지려고 노비들이 작당해서 지주 몰아내려는 것 아니야? 넌 안 그래? 너희들 노조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고. 내가 안 막았잖아.
힘 가지라고, 힘! 노조 만드니 마니, 그것도 트렌드라고 다들 만드는데 내가 말린다고 되겠니. 근데 말이지, 힘 가져 보면 알아. 공평하게 힘을 나누려 하지 않아. 힘없는 존재 앞에 군림하려 하지.
너희들은 안 그럴 것 같지? 인간 본성이 남보다 쎈 거 과시하는 건데. 그건 그렇고 나는 말야, 한국 노조들이 밥통 하나는 제대로 만들고, 텔레비전 한 대는 튼튼하게 만들고 권리든 뭐든 주장하기를 바라. 내 아버지는 공부 안 하고 밥만 많이 처먹는 놈들은 죽도록 패 주고 싶다고 했거든. 내가 졸라 열심히 공부한 건 안 맞으려고, 아니 밥 많이 먹으려고.”
권지호는 눈을 찡긋했다. 희숙이 권지호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권지호도 어린애처럼 눈만 껌벅이는 희숙이 귀엽다는 듯 양손으로 볼을 쥐고 흔들며 말했다.
“그래서 진실을 배워야 하는 거야, 정확하게. 알겠니? 나 먼저 간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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