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91] 코끼리 보온병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연재소설

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4-23 06:20:30

권지호가 희숙에게 건넨 건 제법 부피가 큰 물건이었다. 노란 황금 보자기에 둘러싸인 물건을 주면서 권지호가 중얼거렸다. “쪽팔려서 혼났네. 내가 이제 이런 것도 들고 다니는군.”

희숙이 어리둥절해서 보자기를 풀었다. 포장 겉면에 온통 일본어였지만 누가 봐도 코끼리표 보온병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놀라서 입을 닫지 못하고 있는 희숙에게 권지호는 자비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숙소에서 컵라면 많이 먹지? 양은냄비로 물 끓이지 말고 저거 써. 몇 시간 지나도 팔팔 끓은 것처럼 뜨거워. 아이고, 부산 아줌마들 단체로 일본 가서 코끼리 밥통 사 왔다가 걸린 이후로 코끼리표 밥통이니 보온병이니 사 오면 눈치 보여서….”

희숙의 감동하는 표정을 보자 권지호는 다시 생색냈다.

“뭘 또 그렇게 감동해, 실은 내가 사 온 거 아니고 부산 사는 누나가 지난주 올라왔잖아. 나 쓰라고 주더라고. 그 여편네는 결혼 안 한 나한테 살림살이를 왜 주는지 몰라. 우리 집에 저거 두 개나 있어. 그래서 누나가 준 거 박스 째 안 풀고 가져온 거야. 금화한테 요긴할 것 같아서.” 희숙은 감동한 나머지 울컥했다. 누나가 준 거라고 말하지만 희숙은 믿지 않았다. 집에 두 개나 있다면서 굳이 또 가져왔다는 걸 믿을 사람은 없다. 권지호가 누나에게 부탁한 게 틀림없었다. 희숙은 포장을 벗겨 보라는 권지호의 말에 노란 황금 보자기를 도로 집어 들었다.

“내가 일본어는 모르지만 배워서 쓸게요.” 보온병을 꺼내 확인도 안 한 채 도자기 다루듯 황금색 노란 보자기로 감싸는 희숙의 모습이 애처로웠는지 웃겼는지 권지호는 어이없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일본어 배울 필요 없어. 설명서 보지 않고도 사용할 수 있어. 코드 꽂고, 물 넣고. 뚜껑 위의 그림 순서대로 하면 끝. 오케이?”

희숙이 포장을 뜯지 않은 건, 그대로 부산 아버지 댁에 보낼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권지호가 잘 쓰고 있냐 물으면 그렇다고 말하면 그만이다. 숙소에 와서 확인할 것도 아니다. 권지호는 탕비실에서 희숙에게 만날 장소가 적힌 쪽지를 건넸다. 일주일 뒤였다. 희숙은 쪽지를 슬쩍 열어 보고 나서 지난번에 큰 선물을 받았으니 권지호에게 감사의 표시로 특별한 서비스를 해 주겠다고 했다. 권지호는 희숙의 귀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기대되는 걸? 그날 여고생 교복 구해 와 봐 그럼, 그거 입고 하자.”

그는 콧잔등을 찡그리곤 이내 돌아섰다. 희숙이 어디서 교복을? 말을 마치기도 전이었다. 희숙은 권지호가 오기 전에 모텔로 들어갔다. 여고 때 입던 교복이었다. 쪽지 받은 날, 희숙은 부산 집에 전화해 자신이 입던 교복을 부쳐 달라고 했다. 세일러복 형태의 상의는 여전히 잘 맞았다.

여고 시절 희숙은 마른 편이었다. 대학에 와서 체중이 조금 느는 듯했다. 두 번의 임신중절 후 희숙은 여고 시절 몸무게로 다시 돌아갔다. 불과 3년 사이, 교복을 입고 화장실 거울에 비친 희숙의 모습은 늙고 초췌했다. 올리비아 핫세를 닮은 여고생은 사라지고 깡마른 여성 노동자가 세파의 잔짐을 진 채 힘겹게 서 있었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박선경 필진페이지 +

후원하기

정기 후원
일반 후원
무통장입금: 하나은행 158-910019-39504 스카이데일리
스카이데일리는 온라인 판 스카이데일리닷컴과 32면 대판으로
매일 발행되는 일간종합신문 스카이데일리(조간)를 통해 독자 여러분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후원자 분들께는 지면광고를 하고자 하실 경우
특별 할인가격이 제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