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13] 혁명의 아이콘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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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2-26 06:30:03

그 부분에서 은영은 말이 막혔다. 들은 정보를 다 기억하기에 은영은 아직 어렸다. 승연은 다 아는 얘기였고 집에는 은영이 말한 책들이 서가에 몇 권 꽂혀 있기도 했다. 승연의 오빠와 언니는 그 책들을 읽다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던져 버리곤 했다.

은영은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대부분 선배 자취방에서 읽은 책을 가지고 토론하는데 이게 세미나래. 운동권은 크든 작든 하나의 잘 훈련된 조직이야.” 서열이 있다는 말에 승연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서열과 계급 타파를 부르짖는 운동권에 서열과 계급이 존재한다는 게 말이 돼?”

은영은 승연의 대꾸를 예상이나 한 것처럼 대답했다. “어쨌든 구조가 탄탄해야 조직이 흔들리지 않고 임무를 수행하지 않겠어? 새내기 의식화 교육은 한 학년 위 선배들이 지도한대.”

“지적으로 신생아나 다름없는 새내기들이 선배들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하겠구나. 선배들은 세상을 바꿀 혁명의 아이콘이 되는 거고, 새내기들은 선배의 권위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교수들을 우습게 생각하는 학생도 나온다니 지적 교만이 차고 넘치는 이유를 알겠다. 근데 은영이 너는 이걸 어떻게 알았니? 너 혹시 의식화 교육 받는 거 아니야?”

승연의 빈정거림에 은영은 손사래를 쳤지만 그렇다고 아주 강하게 부인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냥, 그런 얘기들을 아는 게 멋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승연은 눈치껏 윤희숙을 스캔했다. 민낯의 윤희숙은 술잔을 들이켜려고 고무줄로 자신의 단발머리를 묶었다. 작은 얼굴이 더 작아 보였다. 윤희숙 앞에 있던 남자가 윤희숙과 잔을 부딪치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윤희숙이랑 얘기하고 있는 저 남자는 누구야?” 승연이 이번엔 은영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 김태주 선배라고 경제학과 3학년이래. 우리 학교 운동권 대부? 하, 뭐라던데, 그런 존재래. 머리가 기막히게 좋고. 그 이상은 모르겠어.”

승연은 은영의 설명에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흥, 머리 좋아 봤자지 뭐, 머리 좋은데 이곳에 오나?’ 김태주는 선후배·동기들이 먹고 떠드는 동안 말없이 막걸리만 마시고 있었다. 안주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동기들이 묻는 말에 짧게 대답했고 좌우 두리번거리지도 않았다. 후배들이 인사할 때 상대를 힐끗, 한번 쳐다본 것 말고는 후배들과 대화에 집중하는 것 같지 않았다.

손가락이 민망하지 않도록 파전을 젓가락으로 가르는 시늉이나 반찬으로 놓인 깍두기 한 점·양파 절임 한 조각 입에 대는 것이 전부였다. 다만 윤희숙과 몇 마디 나눌 뿐이었다. 그는 승연의 대각선 쪽에 앉아 거리가 멀었고 고개를 돌리지 않아 옆모습만 비쳤다. 이발한 지 몇 달은 돼 보였다. 긴 앞머리가 눈을 가려 높고 반듯한 콧대만 보였다. 좌식 식탁이라 허리가 아픈지 간혹 허리를 펴곤 했는데 그래도 주위를 두리번거리진 않았다. 그의 앞에 앉은 동기들이 승연 얘길 했는지 아, 하며 고개만 끄덕이다가 승연을 곁눈질로 슬쩍 보곤 피식 웃었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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