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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213] 스크린도어가 열려 있다!
또다시 길을 잃고 만 유리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1-15 06:20:21
 
 
플랫폼에 멈춰 선 유리는 뭔가 이상한 걸 눈치챘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선로 쪽을 쳐다보았다. 두 팔을 벌려 환영하듯 활짝 열려 있는 고장 난 스크린도어를 보는 순간 유리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그것이 신혼여행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벌건 심장이 툭 떨어져 발등을 짓찧는 것 같았다.
 
유리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마냥 들뜬 건 그녀의 영웅 씨였다. 트렁크를 끌면서도 뒷걸음질치며 스마트폰 카메라로 연신 유리를 찍어댔다. 그들은 빨간색 소화기를 지나 네 번째 스크린도어 앞에 나란히 놓인 두 개의 벤치 중 하나에 앉았다. 나는 그들과 객차 하나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그들과 나 사이에는 승객 구호 장비함이 있어서 내 모습을 숨기기에 알맞았다.
유리의 영웅 씨는 트렁크를 세우고 어깨에 메고 있던 배낭을 그 위에 올렸다. 유리도 배낭을 풀어 옆에 내려놓았다. 유리는 열차가 들어올 방향을 바라보았다. 승강장 모니터에 방화행 열차가 마포를 출발했다는 알림이 떴다. 유리는 알림 화면에서 눈을 떼고는 무언가 깜빡 잊은 듯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영웅 씨에게 말했다. 그를 마주 보며 예쁘게 웃었다. 옷매무새를 만져 주고 손을 들어 올려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다음 열차를 타면 되잖아.”
 
유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영웅 씨는 스크린도어가 열려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유리를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보살피기에 그는 너무나 착하고 용감하고 긍정적인, 그러나 미숙한 청년이었다. 손목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한 뒤, 그는 주머니를 뒤져 천 원짜리 지폐를 찾아냈다. 유리가 엘리베이터 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자판기 위치를 알려 주었다. 영웅 씨는 한쪽으로 기울어져서 발을 절룩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이 멀어지자 유리가 고개를 돌려 흔들리는 시선으로 선로를 쳐다보았다.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는 벨소리가 울리고 안전선을 지켜 달라는 안내 방송이 들렸다. 벽에 가려 영웅 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꿈을 버리고 영웅 씨한테 도망친 거예요. 더 갈 곳이 없었거든요. 코슈노바. 그래요. 그녀처럼, 나는 또 길을 잃어버리고 만 거예요.”
 
신부대기실 천장의 조명을 눈이 부시도록 우러르던 유리는 문득 현실로 돌아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코슈노바. 망치가 뒤통수를 내려치는 것 같았다. 유리가 모델의 이름을 처음 말했을 때, 나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그녀를 찾았다. 이미 오래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걸 알고 놀랐다. 당시 열네 살이었을 유리는 모델이 자살했다는 기사를 접하며 아마도 처음, 코슈노바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길을 잃었어.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을까?’
 
유리의 유서인 줄 알았던 글 역시 죽기 얼마 전, 스물한 번째 생일을 앞둔 코슈노바가 자신의 소셜 네트워크에 남긴 글이었다.
 
아저씨.”
 
머리카락이 쭈빗 곤두선 내 앞에 유리가 마주 앉았다. 그녀가 내 손을 꼭 쥐고 말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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