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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랑유원지와 세월호납골당 그리고 장기표', '소외된 약자 편에서 평생을 투쟁한 장기표 선생이 필자에게 “납...'))
굵은 빗줄기가 얼굴을 때린다. 국군의날인 1일 새벽 5시 안산 문화예술의전당 맞은편, 세월호납골당이 들어설 화랑유원지 입구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잠자던 필자는 깜깜한 새벽 소나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랴부랴 텐트를 치고 널부러진 물건들을 텐트 안으로 던졌다. 그러나 모든 것이 이미 흠뻑 젖은 뒤였다. 텐트를 못 치게 한 경찰의 권고로 길바닥 노숙 투쟁 중에 내린 비였다. 세월호납골당 반대 단식투쟁을 8일째 이어 오던 필자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발발대다가 주저앉았다. 비는 더욱 굵어지더니 속절없이 아침까지 내렸다.
‘바람이여 그냥 지나지 말라/ 태양이라도 이곳에는 지지 말라/ 나라가 위태로울 때 총알받이로 위난을 막고/ 꽃이 되고 향기가 되기를 포기한 채/ 우리의 생명을 대신한 님들이 이 땅을 지키고 있으니.’
1950년 고등학교 1학년 때 전쟁이 터져 마을 주민들은 피난을 가야 했다. 짝사랑하던 순이도 엄마 아빠 따라 피난길에 올랐다. 그때 마을 곳곳에 “남자라면 전쟁에 참전해 나라를 지키자”는 가두방송이 쩌렁쩌렁 울렸다. 총을 쏠 줄도 몰랐지만 친구들과 17세 학도병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배고픔과 추위에 얼어 죽는 전우가 속출했다. 그러다가 이름 모를 산하에서 친구들과 전우는 적의 총탄에 쓰러지고 어린 학도병은 북괴군의 포탄에 발목이 절단되고 만다.
다행히 전쟁이 끝났으나 다리 한 짝을 나라에 바친 학도병에겐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어딜 가든 사람들이 “앉은뱅이” “깨금발이”라 놀려대며 돌맹이를 던졌다. 정처없이 떠돌며 거렁뱅이로 전전했다. 그러자 나라에서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초지리 ‘화랑농장’으로 이주시켰다. 우리는 그렇게 안산시 화랑농장에서 황무지를 일구며 평생을 살아갔다.
“정말 나쁜 사람들이군요.” 4월 벚꽃이 만개한 안산시 화랑유원지 호숫가 바위에 걸터앉은 노신사가 상춘객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올 10월, 호수 앞 거대한 공원에 세월호납골당이 들어선다는 것을 알고 의아심에 들른 장기표 선생이었다.
그는 7000평에 이르는 세월호납골당 예정지와 조각공원·야외음악당·단원각·경기도미술관을 돌고 돌아 호숫가 둘레길을 걸으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이용사들의 충혼탑에 들러 호국 영령들에 대한 묵념을 드렸다.
그리고 충혼탑 뒤 묘비에 쓰여진 ‘바람이여 그냥 지나지 말라’는 시를 음미한 뒤 호숫가 바위에 걸터앉아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이런 곳에 납골당을….”
문경환 일병(320430-1231511)·이병삼 일병·이용근 일병·이해천 일병·안교준 일병 외 수십 명의 상이용사들과 수백 명의 가족들…. 화랑유원지는 6·25전쟁에 참전해 팔다리가 절단된 어린 학도병들과 상이용사들이 처절하게 살던 화랑농장이었다. 원주민은 화랑농장을 병신들이 사는 ‘깨금발이 마을’ ‘갈고리촌’이라 불렀다. 그리고 얼씬도 하지 않았다.
나라를 지키다가 희생당했음에도 다리가 절단된 상이용사들을 깨금발이라고 놀려대던 참담함! 손목이 절단되어 갈고리를 끼우고 사는 상이용사들이 사는 곳을 갈고리촌이라고 얕잡아 부르던 곳!
국가를 위해 몸을 바쳤지만 그 화랑농장에서 쫒겨난 상이군경 용사들은 모두 하늘의 별이 되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상이용사들의 묘지가 단 1기도 없다. 그런 이곳에 10월이면 세월호납골당(416생명안전공원)이 들어선다. 서울대 법대생으로 박정희 정권 시절 월남 파병에 자원한 장기표로서는 억장이 무너질 일이었다.
나이 들어서도 남편과 맞벌이를 했던 여인은 일을 마치고 시장에 들러 장을 본 후 가족의 저녁을 준비했다. 화학·물리학 박사로 가정부를 둘 수 있는 여유가 있었음에도 부부는 수십 년 동안 평범한 아파트에 살며 세탁기는 무료전기가 제공되는 저녁에 돌렸다. 옷차림은 항상 수수하고 검소했다.
‘세계의 여인’이라 불리며 유럽의 경제대국 독일을 18년 동안 통치한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 얘기다. 그녀는 어떤 친척도 정부 지도부에 임명하지 않았고 부동산·자동차·요트 및 수영장이 딸린 저택과 정원도 없었다. 가사도우미는 물론 패셔너블한 고급 의상도 없었다. 그냥 수더분한 동네 아줌마의 모습이었다.
얼마 전 평균 연봉이 1억2000만 원인 은행원 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조합원들이 “가족과 아침밥을 먹을 수 있도록 출근 시간을 늦춰 달라”는 끝장 투쟁을 벌이더니 저녁엔 삽겹살에 소주로 끝장을 봤다.
6·25전쟁 이후 학생운동·노동운동·민주화운동·인권운동·정치운동·북한인권운동·정의사회운동을 다 한 사람은 장기표가 유일하다. 영원한 재야였던 그가 대한민국에 뿌린 가치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만큼 크다.
국민 개개인이 자아를 실현하게 하는 행복한 정치를 꿈꾸며 평생을 정직하고 청렴하게 살아온 그가 화랑유원지를 다녀가고 5개월 후인 9월22일 하늘나라로 떠났다. 5일장 내내 수더분한 아저씨였던 장기표를 지키며 홍어무침에 소주를 곁들이고 싶었지만 공교롭게도 필자가 세월호납골당 반대 투쟁을 시작한 날이었다. 가시는 길을 지키는 것이 도리일 것이나 장기표라면 죽더라도 현장을 지켰을 것이다.
소외된 약자 편에서 평생을 투쟁한 장 선생이 필자에게 “납골당을 막을 수만 있다면 막아라”며 의미심장한 미소로 화랑유원지를 바라보던 모습이 24시간 무기한 노숙 투쟁으로 지친 필자의 가슴에 보석처럼 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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