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161] 도망갈 구멍, 변명을 위한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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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한 건 내가 아니라는 어리석은 항변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8-27 06:30:20

‘미안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어요. 당신과 함께하는 시간은 달콤하고 황홀하지만 나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내 삶은 여전히 허무하고 사랑조차 공허할 뿐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어요. 오늘로 내 인생이 끝난다 해도 그래서 나는 당신과 함께할 수 없어요. 미안해요. 단언컨대 당신은 내가 만난 가장 아름답고 향기로운 최고의 여자였어요. 하지만 난 당신을 가질 자격이 없어요. 내 마음은 병들었고 삶에 대해 아무런 기대가 없으니까요. 네, 저는 이토록 못났어요. 그런데 왜 당신을 사랑했냐고요? 아, 그건 혹독하게 외로운 나의 눈이 당신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어요.

하운 씨, 나는 외로움과 허무, 그리고 뜨거웠던 당신의 기억을 안고 다가오는 죽음을 견디겠습니다. 만약 내일이 있다면, 무연하게 그 누구와도 인연을 맺지 않고 당신의 기억만을 안고 살아가겠습니다.’

나는 말하지 않으려고 힘주어 입술을 깨물어야만 했다. 소리 내어 이 말을 하면 하운은 배꼽을 쥐고 웃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온갖 변명을 지어내고 있는 내 눈을 하운의 눈빛이 예리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해 식은 커피잔을 내려다보았다.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내가 하운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바로 저 눈빛 때문이었다. 결국 나를 버리고 도망갈 거였으면서 나를 위해서라는 듯 조심조심 발뒤꿈치를 들고 다니고 하루에 다섯 번씩 걸레질을 하며 판단을 유보했던 아내처럼, 하운은 속아 주지 않았다.

날 버릴 거였으면서 그날 아침 오줌을 싼 요를 말아 안고 나갈 때의 눈빛도, 대문 밖으로 나갔다가 깜빡 놓고 간 신발주머니를 가지러 뛰어 들어갔을 때, 나를 바라보던 어머니의 마지막 눈빛도 그랬다. 당신 없이 살아가야 할 어린 아들을 혼내면서도 걱정하고, 타이르면서도 미안해 하고, 그러나 거스를 수 없는 어떤 힘에 압도되어 흔들리지 않던 눈빛.

자신의 선택을 번복하지 않는, 무섭도록 단호한 확신. 어떻게 자신의 결정을 확고하게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취소될 수 없었던 어머니의 결단처럼 하운도 이미 날 판단했고 선택했고 결정했다는 걸, 그녀의 눈빛은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있을 거예요. 세상 남자 다 만나 본 게 아니잖아요. 하운 씨는 반드시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될 거예요. 산타의 존재를 믿는 아이만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을 받을 수 있잖아요. 산타가 없다는 걸 알아 버린 아이는 부모가 주는 선물을 받을 수 있을 뿐이죠. 그러니 믿으세요. 트러스트 미!”

나는 과장해서 말하고 과장되게 하하, 웃었다. 그러고는 스스로 무안해져서 힘주어 커피잔을 손에 쥐었다.

“아내를 배신한 것 같아요?”

생각 깊은 눈빛으로 나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하운이 직격탄을 쏘듯 물었다.

“이혼했는걸요.”

심장에 칼이라도 꽂힌 듯 가슴이 시리고 아팠다. 잔을 놓고 주먹을 꼭 움켜쥐었다. 나는 달봉을 질투했다. 배신한 건 내가 아니라고, 날 배반한 건 그들이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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