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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가 구호를 외칠 때마다 희숙은 그들을 따라 오른 주먹을 불끈 쥐고 목청 터져라 소리질렀다. 희숙의 모습은 영락없는 노동자였다. 희숙은 승연의 시선 따윈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선배 어디 계세요? 혹시 우리 아버지 회사는 아니겠죠?” 승연은 엄마 잃어버릴까 봐 손 꼭 붙잡고 따라다니는 아이처럼 행동했다. 희숙은 저쪽으로 가자며 승연의 손을 서문통닭 옆 건물 담벼락 아래로 이끌었다. “말해 줄 수 없어. 너희 아버지 패션 회사라며. 난 다른 곳이야. 아버지 공장이 이 근처니?” “네. 주안 산단에. 오늘 회사에 나가셨는데 걱정돼요.”
희숙은 일요일이라 회사 문은 닫았을 거라면서 걱정하는 승연을 안심시켰다. 희숙의 눈은 군중을 향했다. 군중의 동향을 살피면서 언제든지 군중 속으로 뛰어들 자세를 유지했다. 투지를 담은 눈이 이글거렸다. 그런 희숙이 멋지게 느껴지면서도 왠지 모르게 안타까웠다.
“너 혼자 왔어?” “아녜요. 기순일 주안역 2번 출구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못 만났어요. 못 만나면 12시에 교보생명 앞에서 보기로 했어요.”
희숙은 기순이 만나면 안부 전해 달라며 승연 어깨를 두드렸다. 승연은 희숙을 어디 가면 만날 수 있는지, 연락처는 알 수 있는지 물었다. 희숙은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 좋은 날 있을 때 만나게 될 거야. 그런데 승연아, 기특하다.” 희숙은 승연의 손을 굳게 잡았다. 희숙이 잡은 손을 놓으려 하자 승연은 뭔가 생각난 듯 지갑에서 명함을 꺼냈다.
“정일어패럴. 아버지 회사예요. 이 뒤에 제 집 전화번호 남길게요. 꼭 전화 주세요.” 희숙은 명함을 힐끗 보더니 윗주머니에 넣고는 주머니를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꼭 연락하겠다는 제스처였다.
집 전화번호를 남긴 명함을 건네자마자 시민회관 방향에서 최루탄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거리는 엄청난 최루탄 연기로 뒤덮여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희숙은 재빨리 목에 두르고 있던 스카프로 입을 가리며 승연에게 가라는 손짓을 하고 시민회관 사거리 쪽으로 뛰어갔다. 희숙의 뒷모습이 연기에 가려 희미해졌다. 희숙의 모습은 전쟁 신화에 나오는 구국의 여전사였다. 목숨보다 사명이 중요했다. 희숙의 눈엔 거룩한 사명을 이루고 말겠다는 숭고한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최루탄 연기 때문에 승연은 교보생명 방향으로 갈 수 없었다. 콧물이 흐르고 목이 따가웠다. 빨리 이 지옥을 벗어나야 했다. 승연은 주안 성당 뒤로 뛰어갔다. 사거리 대각선에 있는 민정당 지구당사 쪽에서 검은 연기가 솟구쳐 올랐다. 거리엔 깨진 보도블럭·전단지·최루탄 분말 가루가 잔뜩 깔렸다. 승연은 최루탄을 피해 도망치는 인파 안으로 들어갔다. 기순이는 왔는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승연은 흥분했다. 희숙과 함께 역사의 현장에 점 하나를 찍었단 생각이 들자 어깨가 으쓱했다. 승연은 시민들의 열망이 이 정권을 반드시 무너뜨리리라 믿었다. 고통을 잉태하지 않은 자유는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저항뿐이었다. 승연은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잊고 있었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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