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86] 낯선 곳에서 하룻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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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4-16 06:20:30

불을 끄고도 잠이 오지 않았다. 방바닥은 따뜻해도 방 공기는 차가웠다. 둘은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겼다. 서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면서도 모른 체 했다. 좋아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태주를 따라오지 않았다. 아끼는 마음이 없었다면 승연과 함께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지 못했는데 한 이불을 덮고 자는 게 맞는지 승연은 확신이 없었다. 태주 전화를 기다리면서 승연은 그리움이 사랑의 신호란 걸 깨달았지만….

승연은 태주에게 물었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숲속 동굴에 있는 것처럼 크게 울려 퍼졌다.

“있잖아요, 건대 사건 때. 저 때문에 건물 안으로 못 들어간 거죠? 태주 선배가 절 발견하지 못했으면 제가 잡혔을 거예요. 그리고 아버지가 어떻게든 빼내 주셨을 거고 전 지금쯤 미국 갈 준비를 하고 있을 거예요.”

승연이 뿜어낸 입김이 허공에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태주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건 승연이 궁금해서 물어본 내용이 아니었다. 언젠가 건대에서 있었던 일을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무등여관에서, 당장 이 순간에 묻고 싶은 내용이 아니란 걸 태주는 알고 있었다. 승연은 억지로라도 첫날밤의 인과관계를 정리해 두고 싶었다는 것을.

“제가 건대에서처럼 아니, 더 위험한 처지에 놓였어도 선배가 절 구하러 왔을까요?”

승연은 위험한 처지에 놓였어도, 라는 전제를 이불 속으로 끌어들였다. 잠이 안 오는 이유를 태주나 승연이가 모를 리 없었다. 태주의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 틈으로 새어 든 빛이 방안을 제법 훤히 비추었다. 태주로부터 대답이 없자 승연은 다시 몸을 반대편으로 뒤척였다. 어느새 태주는 이미 승연의 곁으로 와 있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너를 두고 잠이 안 오네. 그게 궁금했니. 구하러 가지, 무슨 일이 있어도.” 태주는 승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승연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포갰다. 태주의 손이 승연의 셔츠 속으로 들어왔다. 승연은 숨이 멎는 것처럼 떨렸다. 너무 긴장한 탓인지 승연의 몸이 돌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여고 졸업 후 만난 석진과 키스했을 때도 이렇게 떨리거나 설레지는 않았다. 입맞춤이나 손의 느낌, 작은 흥분까지 모든 게 낯설었지만 황홀했다. 태주의 입술은 승연의 귀와 목을 지나 가슴에 머물렀다. 승연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 나왔다. 태주가 승연의 팬티를 벗기려 하자 승연이 그의 손을 제지했다. 승연은 울 듯 말 듯, 혹은 간절하게 애원하듯 입을 열었다.

“저, 처음인데 아프면 어쩌죠.” 태주는 승연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얼굴을 어루만졌다. 창틈으로 들어온 빛에 반사된 승연은 아름다웠다. 승연은 길을 잃고 헤매는 별 하나였다. “그럼 하지 말까? 네가 원하지 않으면 안 할 거야.” 승연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잡았던 태주 손을 놓았다. 아픔을 참겠다는 각오였지만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태주는 서두르지 않았다. 승연이 아프지 않도록 천천히, 부드럽게 품었다. 승연은 그가, 이 순간만이라도 짐을 내려놓고 자기 품 안에서 행복하길 바랐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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