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산의 울림] 정주영 회장이 생각나는 추석 연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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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산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9-20 06:31:20

한국에서 맞는 22번째 추석이 지나갔다. 이번 추석 연휴는 이상하게도 더 길었고 이상하게도 더 무더웠고 이상하게도 고향이 더 그리웠다. TV에서 정글 속의 군사개미떼마냥 줄을 서서 열심히 달리는 귀성 차량들을 보고 있노라니 고향으로 가는 그들이 부러웠다. 나도 당장 차를 타고 북녘 고향으로 달려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먹고사는 데 부족한 것도 없고, 또 추석이라며 지인들이 정성스럽게 보내 준 갖가지 선물 꾸러미들도 가득한데, 그리고 이제는 적은 나이도 아닌데 왜 이리도 고향이 그리운 건지 모르겠다.

물론 이제는 고향이라고 찾아가 봐야 나를 알아볼 사람도, 반겨 줄 사람도 없을 것이다. 사방에 세워진 노동당의 시뻘건 선전선동 구호판들만이 그곳이 세계 최고의 독재국가임을 알려 줄 것이다. 풀대 무성한 들판과 시커먼 지붕을 한 초라한 집들과 그 집 마당들에서는 먹지 못해 빼빼 마른 강아지들만이 낯선 나를 보고 영악스럽게 짖어댈 그런 곳이다.

그럼에도 왜 그런지 날이 갈수록 더 그리워지는 고향이다. 배고프고 자유가 없는 땅이지만 그래도 그곳은 나의 부모님이 잠들어 있고, 우리 가문의 피붙이들이 아직은 어디엔가 살아 있을지도 모를 땅이다. 그래서인지 나의 의식이 영원히 사라지기 전에 어린 시절 공부하며 뛰놀았던 그 소박한 땅을 한 번은 밟아 보고 눈을 감고 싶다.

어릴 때에는 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 배웠던 이 한반도는 인간들의 한이 가득 서린 원한의 땅이라고 나는 단언한다. 내가 살아 보니 인생살이 70여 년 참으로 무상하고 눈 몇 번 감았다 뜨면 훌쩍 지나가 버리는 세월이었다. 그런데도 살아서 그리운 고향도 못 가 보고, 자식과 일가 친척도 못 만나 보고 한을 품고 죽어야만 하는 이런 나라가 세상 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

수만 명의 탈북인과 수백만 명의 실향민이 얼마나 고향을 그리워하다가 이 땅에 한만 남긴 채 생을 마감했을 것인가. 남북한의 정치가들은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정치적 쇼로 이산가족들의 아픔을 자신들의 치적 쌓기에 이용만 해 먹은 잔인한 자들이다.

천하의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 회장도 오죽이나 고향 땅이 그리웠으면 인생 말년에 소 1001마리와 수천억 원의 재산을 제물로 바치면서까지 고향을 찾아갔겠는가. 나에게도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면 이제라도 아낌없이 다 버리고 고향으로 가 보고 싶다.

1998년 정주영 회장이 평양에서 했던 말이 우리를 놀라게 했던 생각이 난다. 정 회장이 소 500마리를 가지고 방북했다가 한국으로 돌아갈 때였다. 관계 부문 일꾼들이 정 회장에게 “김정일 동지께서는 정주영 회장이 분계선으로 나가시면 남조선 괴뢰들이 정 회장을 해하거나 체포할 수도 있으니 제3국으로 해서 안전하게 돌아가도록 배려하여 주셨습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정 회장은 의외로 큰 소리로 웃으며 “아니 누가 감히 나를 체포한단 말이오?” 하면서 “내가 한국 군대를 모두 먹여 살리는데 그놈들이 나에게 감사할 일이지 나를 왜 잡아간단 말이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해를 못 한 북한 사람들이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하고 묻자 정 회장은 “내가 국가에 내는 세금으로 한국 군대를 거의 먹여 살리고 있다. 만약 내가 세금을 안 내면 한국 군대나 경찰도 굶게 된다”고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그 말을 듣고 놀란 북한 관계자들이 “우리 같은 북조선 사람인 정 선생이 어떻게 그렇게 돈을 많이 버는가?” 하고 묻자 정 회장은 “자유! 자유가 있으니까 그것이 가능합니다”고 말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김정일은 매우 기분 나빠 했다고 한다. 나는 당시 정 회장이 한 말을 전해 듣고는 선뜻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4년 후인 2002년 자유를 찾아 한국에 와서 자유민주주의의 현실을 직접 눈으로 보고 또 내 손으로 돈을 벌어 보고서야 그 말의 참뜻을 알게 되었다.

북한에도 한국과 같은 그런 자유가 있었더라면 미공급(고난의 행군) 때 300만 명이 아니라 단 3명도 굶어 죽지 않았으리라는, 그 자유의 진리를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정 회장을 좋게는 평가하지 않는다. 물론 정 회장 자신은 고향에 가 보았지만, 그 대신에 김대중의 햇볕정책에 동조하여 북한에 수억 달러의 돈과 물자를 퍼 주어서 망해 가던 독재 정권을 살려 주었고, 설령 본의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북한 국민의 노예 생활을 수십 년간 연장시키는 데 동조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정 회장도 김대중에게 이용당한 것이라고 우기겠지만 어쨌든 그는 김정일이라는 독재자를 살려 주었다. 그래서 우리 같은 탈북인들과 2300만 북한 동포들에게는 해를 끼친 사람이다.

다음 번 추석에는 제발 고향에 가게 해 달라는 탈북인들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하늘에 빌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