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124] 진창이 되어 사라진 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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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눅 들지 않던 아이의 기억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7-04 06:30:10

“내일 오전에 갈까?”

“애들이 피곤할 거야. 저녁 어때? 놀이터로 애들 데리고 나갈게. 6시쯤 근처에 와서 전화 줘.”

아내가 빨리 끊고 싶은 듯 속사포처럼 결론지었다. 잘 다녀오라고, 어쩔 수 없이 내가 인사했다. 아내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얘가 왜 이래?”

아내가 자동차 뒷자리에 몸을 들이밀고 기어이 건을 베이비시트에 앉혔다.

“그래. 아빠 전화였어.”

아내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내는 속이 상한 듯 탁, 하고 뒷문을 닫았다. 다녀오겠다고, 장모에게 인사하고는 조수석에 올라탔다. 달봉이도 장모에게 인사했다. 차가 출발했다. 장모는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질투와 상실감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한 번도 아내가 다른 남자를 만날 거라는 상상을 해본 적 없었다. 이혼했더라도 아내는 내 아이들의 엄마였다. 그 사실이 변함없는 한 나는 아내에게도, 두 아이에게도 이혼 전과 같은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내가 노력하면 가족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어리석은 착각이었다. 아내가 누굴 선택하든, 간섭할 권리가 내게는 없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달랐다. 내 아이들을 다른 사내가 키운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큰아이는 몰라도 작은아이는 아내가 선택한 남자를 아빠라고 생각하며 자랄지도 몰랐다. 그 상대가 달봉이라는 건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들이 떠나고 없는 주차장을 한없이 바라보다 뒤돌아섰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다리에서 기운이 쏙 빠져 걸을 힘조차 없었다. 허청허청 걸어 텅 빈 놀이터 벤치에 주저앉았다.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오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던 눈부신 자신감은 진창이 되어 버린 눈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주머니에 시린 손을 찔러 넣었다. 해적 안대가 손에 만져졌다. 고속버스 기사가 생각났다. 후크든 하록이든, 애꾸눈 해적 선장이 되어 퇴근한 아빠를 그의 아이들은 기쁘게 반겨 줄까.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부터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나에게 아버지가 원한 것은 한 가지였다. 학교에 다녀와서 교회를 청소하는 것, 그것이 아버지가 제안한 타협안이었고 나는 받아들였다. 동갑내기 달봉이가 나타난 것이 그즈음이었다. 제 발로 온 것인지 아버지가 데려온 것인지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보육원에서 살고 있다는 말을 달봉이는 사람들 앞에서 태연하게 했다. 왜 버려졌는지, 부모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는 것 같기도 했고 아예 관심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달봉이는 거의 매일 학교에 간다고 아침 일찍 보육원을 나와서는 교회에 와서 놀았다. 학교에서 내가 돌아오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이제 오냐?” 뛰어나와 반겼다. 제멋대로 작은 교회 구석구석을 뒤지고 돌아다니며 “이건 뭐냐?” “저건 뭐고?” 십자가와 봉헌함·탁종 등을 가리키며 물었다. 성찬 용품들을 신기한 듯 집어 들고 와서는 또 물었다. 내향적인 나와 달리 장난기 많고 흥이 많은 아이였다. 같이 놀자고 말할 때마다 퇴짜를 맞아도 주눅 드는 법이 없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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