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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흥왕의 이복동생인 세종(世宗)은 사람됨이 맑을 뿐 아니라 심지가 깊고 덕을 갖춰 왕실과 조정은 물론 백성들에게서도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세종이 성년의 나이가 되자 모친인 지소 태후는 도성 안에 명을 내려 결혼 적령기에 있는 명문대가의 여식들을 모두 궁으로 들게 했다. 이에 수십 명의 처녀가 성장(盛裝)하고 입궐했다.
태후는 세종과 함께 처녀들이 모여 있는 별궁으로 나아갔다. 궁의 안마당에는 오색 물결이 넘실거렸다. 소매가 긴 화려한 색깔의 저고리와 폭이 넓게 퍼지는 비단 치마·다양한 장식이 달린 허리띠와 오색이 찬연한 가슴 꾸미개·금으로 만든 정교한 세공의 귀걸이와 목걸이가 참가자를 돋보이게 했다.
태후가 나타나자 처녀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미리 준비해 놓은 단에 오른 태후는 흐뭇한 표정으로 세종을 보며 말했다.
“이 중에서 네 마음에 드는 처자를 골라 봐라.”
왕제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태후 폐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너와 백년가약을 맺을 사람인데 네 마음에 들어야지. 도성에서 제일가는 처자들이니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세종은 고개를 들고 처녀들을 하나씩 찬찬히 살폈다. 그러다가 한 처녀와 눈이 마주쳤다. 다른 이들은 부끄러워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데 유독 그 처녀만은 당당히 왕제를 쳐다봤다. 갸름한 얼굴에 우뚝 솟은 콧날은 기러기의 곡선을 연상시켰고, 반짝이는 큰 눈은 빨려 들어갈 만큼 고혹적이었다. 새빨간 입술은 봄날의 꽃망울처럼 당장에라도 터질 듯했다. 화초가 부끄러워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야말로 천상의 선녀가 이 세상으로 내려온 듯했다.
처녀의 차림새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수수했다. 그런데도 그녀의 아름다움은 주변 사람들을 압도했다. 그녀에게서는 들판에서 뛰노는 노루와 같은 생동감이 느껴졌다. 대궐 안에서 자란 세종이 느껴볼 수 없었던 대자연의 생기가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태후도 세종의 시선을 따라 눈길을 주었다. 농염한 자태를 뽐내는 처녀가 서 있었다.
태후는 미소를 띠며 아들에게 물었다.
“저 아이가 마음에 드느냐?”
세종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붉혔다.
태후는 처녀에게 앞으로 나오라 했다. 가까이서 보니 얼굴이 갸름하고 눈이 큰 것이 두말할 나위 없는 미인이었다. 피부도 도화처럼 희고 맑았다. 다만, 어둠이 침잠한 듯한 검고 큰 눈동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콧날 끝이 약간 굽은 것이 고집스럽게 보였다. 앙다문 입술은 뭇 사내를 홀릴 만했다. 화사하게 웃고는 있지만 치마저고리 속에선 찬바람이 일고 있을 것 같았다. 여우의 화신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모습일 듯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태후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처녀가 예를 갖추고 서자 태후는 정신을 가다듬고 차갑게 말을 뱉었다.
“너는 어느 가문의 여식이냐?”
“저는 미진부(未珍夫)의 여식 미실(美室)이라 합니다.”
미진부라면 법흥왕의 총애를 받았던 신하였다. 선왕이 붕어했을 때 후사를 놓고 태후와 의견을 달리한 탓에 지금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태후는 탐탁지 않았지만 왕제의 마음은 이미 미실로 가득 차 있었다.
세종이 미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자 태후는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행사를 마친 후 내궁으로 돌아온 태후는 상대등 이사부를 불렀다. 그녀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이사부에게 의지했다.
이사부가 들어오자 태후는 다짜고짜 한탄부터 늘어놓았다.
“미진부의 여식이라는데, 이를 어쩌면 좋겠소?”
“미진부는 선왕의 총신입니다. 비록 우리와 입장을 달리하기는 했지만 그 역시 나라를 위한 충정에서 비롯된 겁니다. 지금은 포용하고 화합해야 할 때입니다. 이번 혼사를 통해 양측이 화해할 수 있다면 이 또한 왕실의 홍복이 아니겠습니까.”
상대등의 말이 옳았다. 진흥왕의 치세가 안정기에 접어들고 신라가 밖으로 뻗어 나가는 때에 흘러간 과거사에 얽매여 왈가왈부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태후는 단지 미실이 미진부의 자식이라서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녀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현숙한 부인이 되려면 온화하고 덕이 있어야 하는데 그녀에게서는 냉담하고 요사한 기백이 느껴졌다.
태후가 탄식하듯 말했다.
“나도 미진부의 일은 이미 잊었소. 하지만 그 애는 왠지 마음에 걸리는구려.”
이사부는 이를 며느리를 맞이하는 시어머니의 질투쯤으로 치부했다.
“왕제께서 그 아이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셨다면서요. 이번 일은 태후 폐하께서 양보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마침내 태후는 미실을 세종의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을 허락했다.
진흥왕은 궁인들에게 명해 동생의 혼례식을 성대하게 준비토록 했다.
혼례식 전날 미실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간택령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궁궐로 나가 선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온통 사다함(斯多含)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집안에서 결정한 일을 바꿀 수는 없었다.
지난밤, 작별을 고하기 위해 북천의 갈대밭에서 사다함을 만났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등을 보인 채 어깨를 들먹이고 있었다. 그의 고통이 미실의 폐부를 찔러 와 통증으로 아렸다. 미실은 상처를 핥는 고양이처럼 등 뒤에서 사다함을 감싸 안았다. 그의 몸은 심하게 떨고 있었다. 미실은 그의 탄탄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의 따스한 체온이 미치도록 그리울 것이었다.
미실은 당장 둘이서 도망가자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을 힘겹게 가슴속에 밀어 넣었다. 그것은 사다함을 망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미실은 사다함에게 제 몸을 밀착시켰다. 이튿날부터는 청량한 솔 내음 같은 그의 체취를 맡을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의 몸을 더욱 뜨겁게 달궜다.
순간, 사다함이 뒤로 돌아서더니 그녀를 으스러질 정도로 힘껏 안았다. 두 사람은 한 덩이가 되어 갈대밭을 뒹굴었다. 하늘에 걸린 달도 거친 숨을 토해 내는 밤이었다.
미실이 세종과 결혼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다함은 짧지만 굴곡 많았던 생을 마감했다. 그는 생을 마치며 자신의 연적(戀敵)이었던 세종에게 풍월주 자리를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것은 연인에게 남기는 작별 선물이었다.
사다함이 죽던 날 미실은 자다가 꿈을 꾸었다. 그녀가 잠에서 언뜻 깼을 때 사다함이 어두운 얼굴로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미실은 놀랍고 반가운 마음에 그를 불렀지만 그는 미소만 애잔하게 지을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잠시 후 그는 천천히 일어나더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꿈에서 미실은 그를 잡으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꼼짝할 수가 없었다. 미실은 망연히 사다함이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잠에서 깨어난 미실은 사다함에게 변괴가 생긴 것이 아닌가 걱정했다. 아니나 다를까 하녀가 달려와 사다함의 죽음을 알렸다. 미실은 사다함을 마음속에서 떠나보내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자신의 청춘도 떠나보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자신들의 사랑을 망친 운명에 대한 복수심뿐이었다. 비록 그것이 애꿎은 사람들에게 비수를 꽂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녀는 결코 멈출 수 없었다.
세종은 사다함의 뒤를 이어 풍월주의 자리에 올랐다. 처음에는 낭도들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던 전임 풍월주의 뒤를 잇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극구 사양했다. 하지만 미실이 여러 차례 간곡히 청했기에 받아들였다. 왕제는 진실로 미실을 사랑했기에 그녀가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태후는 세종이 아직 연륜이 부족하고 마음이 여린 점을 걱정하여 풍월주가 되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
세종은 모후를 찾아가 설득했다.
“사다함이 저를 인정했기에 그런 유언을 남긴 겁니다. 벗의 유언조차 들어주지 못한다면 어찌 사내대장부라 할 수 있겠습니까.”
세종의 의기에 감복한 태후는 시원하게 허락했다.
제6대 풍월주가 된 세종은 사다함의 이부동모제(異父同母弟)인 설원랑(薛原郞)을 부제로 삼았다. 이 역시 미실의 천거에 따른 것이었다.
이 무렵, 태자 동륜은 만호공주(萬呼公主)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는 성격이 호탕하고 풍류를 좋아했으며 벗과 어울리기를 즐겼다.
미실은 태후를 뵙기 위해 수시로 궁을 드나들었는데, 몇 차례 태자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미색에 반한 동륜은 그녀를 마음에 두었다. 이를 눈치챈 미실은 태자의 주위를 얼쩡거리며 그의 마음을 휘저어 놓았다.
미실의 미모에 반한 것은 동륜뿐만이 아니었다. 진흥왕 또한 제수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사모하게 됐다. 왕은 급기야 미실을 내궁의 전주(殿主)로 발탁하여 곁에 두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형에게 빼앗긴 세종은 크게 상심했다. 하지만 감히 왕에게 대항할 수는 없었다. 그는 풍월주의 일도 팽개치고 밤낮없이 술에 빠져 지냈다.
동륜도 사랑하는 여인을 빼앗아 간 부왕을 원망했지만 내색하지는 못했다. 그러면서 차츰 부자 관계에 금이 갔다.
궁 안에서 미실의 권력은 왕후를 능가했다. 태후는 그녀를 경계했다. 하지만 국왕의 총애를 받고 있기에 함부로 내치지는 못하고 그냥 상황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궁궐에서 입지를 굳힌 미실은 한밤중에 세종을 찾아갔다. 술에 취해 있던 풍월주는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는가 하여 눈을 비볐다. 그의 앞에 있는 사람은 자나 깨나 그리워하던 미실이 분명했다. 그는 반가운 마음에 미실을 억세게 끌어안았다.
미실은 물기를 머금은 그윽한 눈빛으로 세종을 바라봤다.
“지금은 국왕의 강압에 못 이겨 궁에 머물고 있지만 소첩의 마음은 늘 당신 곁에 있어요.”
세종은 슬픔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미실은 감정을 추스르고 말을 이었다.
“우리가 함께할 방법을 궁리하던 중에 묘안이 떠올랐습니다.”
세종은 미실과 함께할 수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하여 다음 말을 재촉했다.
“지금 백제군이 서쪽 변경을 침범했다고 하니 자원해서 전장으로 나가십시오.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후에 저를 놓아 달라고 청한다면 폐하께서도 마다하지 못할 겁니다.”
이때는 진흥왕의 영토 확장이 한창이었기에 국경 지역에서의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미실의 말이라면 섶을 지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일도 마다치 않을 세종이었다. 결국 그는 국왕에게 북한산주(北漢山州)의 군주로 가겠다고 자청했다.
이래저래 껄끄러운 세종을 멀리 보낼 수 있었기에 진흥왕은 흔쾌히 윤허했다.
세종이 많은 낭도를 거느리고 전방으로 나가자 부제인 설원랑이 풍월주의 일을 대신하게 됐다. 그는 미실의 심복이었다.
미실은 설원랑과 자신의 동생인 미생(美生)을 은밀히 불렀다.
“풍월주께서 전방으로 나가신 후 남은 낭도들의 기강이 해이해졌다. 내 이를 가만두고 볼 수는 없으니 너희가 폐하께 주청하여 나를 원화(源花)로 삼도록 하라. 그리하면 내가 나서서 그들의 기강을 바로잡겠다.”
설원랑은 군말 없이 명을 받들었다.
며칠 후 미실은 대궐로 들어가 진흥왕을 알현했다.
“소첩이 폐하의 총애를 받는 것을 시기하는 자가 너무 많습니다. 더구나 흉한 소문까지 돌아서 주변에서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이러다간 무슨 일을 당할지 모릅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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