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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력 492년, 고구려의 장수왕이 79년의 재위를 끝으로 숨을 거두었다. 장손자인 나운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고구려 제21대 임금인 문자명왕(文咨明王)이다.
문자명왕은 당숙 승간(升干)을 북위로 보내 왕위에 오른 사실을 알리고, 관계를 더욱 돈독히 했다. 이는 조왕(祖王)의 외교책을 잇는 행보였다.
백제의 동성왕은 장수왕이 죽었다는 소식들 듣고 쾌재를 불렀다. 뛰어난 지도자가 서거했으니 고구려도 이제 서서히 기울어 갈 것이었다.
백제왕은 이 기회를 살려 고구려를 치고자 했다. 그러자면 신라와의 관계를 개선할 필요가 있었다.
동성왕은 신라에 혼담을 넣었다. 신라의 소지왕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이고 왕족인 아찬 비지(比智)의 딸을 백제 왕에게 시집을 보냈다. 이 혼인을 통해 양국은 결속을 다지게 됐다.
백제 왕은 고구려를 호시탐탐 노렸지만 문자명왕도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외교를 통해 북위와 남제 등 서방 국가들과 우호를 다지면서 군사를 조련하고 군량을 비축하여 남방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이렇게 삼국 간의 팽팽한 긴장감은 폭발 일보 직전에 이르렀다.
서력 494년, 고구려의 문자명왕이 2만의 군사를 동원해 신라의 살수원(薩水原)을 공격했다. 백제의 동성왕은 신라를 돕기 위해 즉시 구원군을 보냈다. 고구려군과 나제 연합군 간에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백제의 방해로 신라의 견아성(犬牙城)을 함락시키는 데 실패한 고구려는 보복 차원에서 백제의 치양성을 쳤다. 이번에는 신라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소지왕은 재빨리 장군 덕지(德智)를 보내 치양성을 지원했다. 양국의 협공을 받은 고구려군은 어쩔 수 없이 퇴각해야 했다. 마치 전갈의 머리를 치면 꼬리가 날아오고, 꼬리를 공격하면 머리로 들이받는 형국이었다.
양국의 합세로 남방 공략이 어려워지자 문자명왕은 백제의 힘이 미치기 어려운 신라의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신라가 당하는 걸 보고만 있을 동성왕이 아니었다. 그는 달솔 우영(優永)을 보내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을 쳤다. 문자명왕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장군 고노(高老)로 하여금 한성을 공격하게 했다.
이처럼 전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 때문에 백성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들은 누가 이기든 하루빨리 전쟁이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 무렵 백제에서는 가뭄이 계속되고 돌림병까지 창궐했다. 백성은 식량이 없어 굶어 죽거나 병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동성왕은 백성의 고통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더욱 많은 성을 축조하고 군비를 늘리기 위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부역에 동원하고 세금을 올렸다.
참다못한 신하들이 나서 여러 차례 만류했지만 동성왕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리되자 충신은 하나둘 조정을 떠났고 비위를 맞추는 간신만이 국왕 옆에 남았다.
동성왕은 근신들과 함께 매일같이 주연을 베풀고 환락에 젖어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술자리에서 한솔(扞率) 비타(毗打)가 국왕에게 아뢰었다.
“폐하의 위명이 사해에 널리 퍼져 있건만 왕궁의 전각은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폐하의 명성에 걸맞은 전각을 세우고 그 위에서 만천하를 두루 살핀다면 천하의 백성이 우러러볼 겁니다.”
비타의 아부에 귀가 솔깃해 진 동성왕은 그 자리에서 새 전각을 축조하라 명했다. 이를 듣고 위사좌평 백가가 나섰다. 그는 조정에 몇 명 남지 않은 충신이었다.
“지금 백성은 잦은 전란과 흉년으로 하루하루 연명하기도 버거운 처지입니다. 그들을 구휼하지는 못할망정 새로운 역사를 벌이다니요.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동성왕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딴청만 피웠다.
백가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간했지만 동성왕은 요리조리 피하기만 했다. 마이동풍이었지만 백가는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간언을 올렸다. 그러자 이를 귀찮게 여긴 왕은 궁문을 닫아걸고 백가의 출입을 막았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입을 다물고 있던 내법좌평 사약사가 나섰다.
“양약이 입에는 쓰나 병에는 이로우며, 충언이 귀에는 거슬리나 행실에는 이롭습니다. 옛날 명군은 자신을 낮추어 남에게 정사를 물었으며 얼굴을 부드럽게 하여 간언을 받아들였습니다. 남이 말하지 않을까 두려워 간쟁(諫爭)을 청하는 북을 달고 비방하는 나무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간하는 말에 귀 기울이기는커녕 궁문을 닫아 진언을 막으셨습니다. 이를 어찌 성군의 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대신의 간언에 동성왕은 몹시 화를 냈다.
“그대는 지난날의 공을 믿고 짐을 능멸하려 하는가. 천하를 아우르는 업적을 남긴 짐이 전각 하나 마음대로 짓지 못한단 말인가. 중신들이 짐을 국왕으로 생각하는지조차 의심스럽도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구나!”
분노한 동성왕은 당장 사약사를 파직하고, 그 자리에 비타를 앉혔다. 이후로는 누구도 충언을 올리지 않았다.
서력 500년, 2년여의 공사 끝에 이층 전각이 완성되었다. 동성왕은 완공을 축하하며 임류각(臨流閣)이라는 현판을 올렸다. 임류각은 높이가 5장에 이를 정도로 웅장하고 형형색색의 단청으로 화려하게 단장돼 있었다.
전각은 웅진성 궁궐의 동쪽에 자리했고 동으로 7개, 남으로 6개의 초석 위에 사방 36자 정방형으로 누대가 세워져 있었다. 둘레에는 연못을 만들고, 뒤로는 동산을 쌓아 운치를 더했다. 연못에는 연꽃을 심고 잉어를 비롯한 희귀한 물고기를 넣었으며 동산에는 기화요초를 심고 진기한 짐승들을 풀어 뛰어놀게 했다. 가히 신선이 산다는 도원을 옮겨 놓은 듯한 풍경이었다.
임류각 꼭대기에 올라서면 북녘으로 도도히 흐르는 금강이 한 눈에 들어왔다. 특히 낙조가 드리울 때는 사람의 마음을 황홀하게 했다.
누각이 완성되자 동성왕은 흑치(黑齒)·부남(扶南)·아유타·유구(琉球) 등을 비롯한 곤륜 여러 나라의 대신과 상인, 페르시아 상인, 산동에 나가 있는 신하와 왜지(倭地)에 있는 태자 사마(斯麻)까지 불러 연회를 베풀었다. 완공을 축하하기 위해 부남과 아유타 상인들은 코끼리와 악어·상아 등을 바쳤고 흑치 사람들은 야광주, 페르시아 상인들은 양털로 짠 최고급 탑등과 낙타·진주 등을 선물로 가져왔다. 산동 성양(成陽)의 백제관에서는 수천 권의 서적과 최고급 비단 천여 필·수천 점의 자기·황금 만 근을 배에 실어 보냈다.
성대한 잔치가 주야로 계속됐다. 이를 바라보는 백성의 가슴속은 원망과 분노로 문드러졌다.
동명왕이 정사를 팽개치고 국내외 하객들과 어울려 밤낮으로 환락을 즐긴 지도 어언 백여 일이 지났다. 살기 어려워진 백성은 고향을 버리고 다른 나라로 달아나거나 도적이 되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날이 갈수록 민심이 흉흉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태자 사마가 부왕의 침전을 찾았다.
동성왕은 평소 사랑하는 태자가 찾아오자 반갑게 맞았다.
“우리 태자에게서도 이제 인군(仁君)의 기상이 느껴지는구나.”
“폐하의 성덕(聖德)은 어디로 갔습니까?”
왜의 무열왕이 폭정을 일삼자 왕자 사마와 사아를 보내 폭군을 몰아내고 백성을 돌보게 했던 이가 바로 동성왕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모습은 폭군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부왕의 부름을 받고 웅진으로 돌아온 사마는 너무도 변한 부왕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인생은 덧없는 것이다. 젊었을 때 짐은 북위를 제압하여 대륙을 개척하고 너희 형제를 보내 왜를 안정시켰다. 신라와의 혼인으로 동맹을 결속하고 고구려를 기백으로 눌렀으니 이제 짐을 거스를 자 누가 있겠느냐. 백제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짐이 풍류를 즐긴다고 해서 욕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구려와 신라는 여전히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고 귀족과 백성의 원성은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어느 놈이 감히 짐에게 원망을 품는단 말이냐?”
“제왕은 항시 주변을 살피고 앞일을 경계해야 합니다.”
동성왕은 태자의 충언을 듣고 느낀 바가 있었다. 그래서 이튿날에는 연회를 열지 않았지만 작심삼일(作心三日)이었다.
한편, 사약사의 뒤를 이어 내법좌평에 오른 비타는 위사좌평 백가를 두려워했다. 웅진은 백가의 근거지였기에 그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아 언제 해를 입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비타는 불안한 마음으로 나날을 보내기보다는 선수를 쳐서 백가를 몰아내기로 마음먹었다.
내법좌평은 동성왕을 찾아가 은밀히 아뢰었다.
“백가는 지난날 폐하께서 자신을 내친 일에 앙심을 품고 있습니다. 언제 역모를 꾀할지 모르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백가는 충성스러운 신하요. 짐은 그를 믿소.”
“그자는 역심을 숨긴 채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백성의 환심을 사기 위해 사재를 털어 구휼하고 있다 합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동성왕도 비타의 말을 자꾸 듣다 보니 의심이 생겼다.
동성왕이 눈을 감고 묻는다.
“백가를 견제할 좋은 방도가 있는가?”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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