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27º
습도 85%
춘천 24º
습도 90%
대전 28º
습도 90%
문단은 바쁘다. 어제의 작가가 오늘의 작가가 될 수 없는 숨가쁜 세상이다. 작가들은 빠르게 소비되고, 명멸한다.
이런 세상에서 김동리는 이제 고색창연한 이름이 되어 있다. 고전적인 작가를 돌보지 않는 세류에 휩쓸려 떠내려갈 법도 하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그의 ‘사반의 십자가’는 상당히 어려운 작품이다. 1958년에 일신사에서 펴낸 ‘사반의 십자가’ 작가의 말에 김동리는 ‘사반’이란 ‘Shaphan’이라고 써 놓았다. 찾아보니 이 ‘Shaphan’은 구약성경의 ‘열왕기’ ‘역대기’ ‘예레미야서’ 같은 데에 나온다. 예수의 시대에 이 ‘사반’이 나오는 곳은 없다. 그렇다면 ‘사반의 십자가’는 성경 속 인물의 이름을 빌려 김동리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 것이다.
김동리는 또 술회한다.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예배당”에 다녔노라고. 그리고 중학교도 미션스쿨을 다녔노라고. 이때 목사님이 ‘좌도(左盜)’와 ‘우도(右盜)’ 이야기를 해 주셨다고 한다.
이 도둑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는 형을 당할 때 그의 왼쪽과 오른쪽에 같이 매달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성경에서 ‘행악자들’이라고도 표현된다. 십자가형을 받은 예수를 관리들과 군인들이 희롱하는데 왼쪽의 도적 역시 예수에게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따진다. 그러자 오른쪽 죄수가 이 왼쪽 죄수를 향해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고 꾸짖는 것을 볼 수 있다.
보통은 왼쪽 도둑의 어리석음과 오른쪽 도둑의 성스러움을 대조시키곤 한다. 그러나 소년 김동리는 이 강론을 들으며 예수로부터 ‘낙원’을 약속받는 오른쪽 도둑보다 왼쪽 도둑에 더 마음이 쏠렸다고 했다.
1982년에 홍성사에서 다시 펴낸 개정판 서문에서 김동리는 말한다. “실국의 한이 얼마나 뼈저리게 원통하고 사무치면 죽음을 겪는 고통 속에서도 위로받기를 단념했을까 싶었다”는 것이다. ‘실국(失國)’이란 ‘나라를 잃는 것’이다. 그러니까 김동리는 망국의 한이 얼마나 깊었으면 이렇듯 예수에게 반항했겠느냐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현대의 연구들에서 이 도둑들은 ‘lēstēs’라 표현되는데, 이 말은 단순한 도적이 아니라 ‘무장한 강도, 산적, 폭도, 반란군’ 등을 가리킨다고 한다. 또 예수와 그들이 받은 십자가형은 단순한 도둑·강도가 아니라 반란을 일으킨 노예, 정치적 저항자, 폭도에게 내려지는 형벌이었다고도 한다. 그들은 그러니까 로마제국에 반역하는 이들이었고, 예수 또한 그들과 같이 로마제국의 질서를 교란하는 자로 형벌을 받은 것이었다.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는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하는 오랜 물음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담고 있다. 예수는 ‘사랑’을 말씀하셨지만 당대의 반역도들, 열심당원(젤롯)이나 시카리(단검파)들은 무장해서 싸워 이겨야 한다고 믿었다. 소설에서 ‘사반’은 ‘혈맹단’의 맹주다. 그는 메시아가 강림하실 때를 기다려 메시아의 힘에 기대어 로마라는 거악(巨惡)에 맞서 떨쳐 일어서고자 했다.
이 거악을 어찌할 것인가.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짓을 알면서도 행하는 자들임에 틀림없건만 예수께서는 어찌하여 그들을 ‘폭력’으로 없애 버리지 말라 하셨단 말인가. 이 현대판 거악을 어떻게 징치해야 한단 말인가. 고민 깊은 나날이 아닐 수 없다.
후원하기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좋아요
감동이에요
화나요
슬퍼요
추천해요0
좋아요0
감동이에요0
화나요0
슬퍼요0
기사제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