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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주사파와 북한의 대남공작 비록(祕錄)
[김동식 기획연재] <11> “김정일 특명 받고 왔다”… 주사파 대놓고 포섭
1980년대 후반 자생 빨갱이 등장… 포섭 공작 더 대담해져
공작조장에 입당시킬 권한 부여… 등급별 체계적 관리
실체도 없는 한민전 추종하는 운동권 실태에 헛웃음
김동식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4-11 06:30:00
 
▲ 김동식 前남파공작원‧대북전략컨설팅 대표
포섭과 전취
 
원래 포섭(包攝)이라는 개념은 상대편을 자기편으로 감싸서 끌어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포섭이라는 개념이 아예 공작과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북한 대남공작부서에서는 국내에서 흔히 사용하는 포섭이라는 표현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투쟁을 좋아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의지를 반영한 탓인지 싸워서 목적한 바를 취한다라는 의미의 전취(戰取)’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한다.
 
주사파 등 남한 사람들을 포섭하기 위해서는 남파 공작원들이 목숨을 걸고 군인들이 총을 들고 경계 근무를 하는 남한에 침투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상대를 단순히 북한 편으로 끌어들이는 정도가 아니라 노동당에 가입시켜 김씨 일가에게 충성하는 남조선 혁명가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 작업이 어렵고 힘들다는 의미에서 전취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북한이 대남 전략 목표를 설명할 때 단순히 한국 정부를 타도하는 것이 아니라, 정권을 빼앗는 것을 의미하는 정권 전취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말하자면 대한민국 정권을 단순히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투쟁을 통해 대한민국 정권을 아예 빼앗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시켜 북한식 사회주의 체제로 만드는 것이 대남 혁명의 진짜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전취라는 용어 대신 남한에서 많이 사용하는 포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로 한다.
 
장관 이상의 권한을 가진 남파 공작조
 
1980년대 후반은 국내 인물들을 포섭하는 전술에 있어서 북한의 대남공작지도부에 일대 전환이 일어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과거에는 남파 공작원들이 국내에 침투한 다음 장기간 매복해 생활하면서 지지자·동조자를 파악한 후 정치적·조직적 관계로 발전시키는 순차적인 방식으로 포섭하는 전술을 구사했기 때문에 시간도 많이 소요되고 성과도 크지 않았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남한에 주사파를 비롯해 자신을 혁명가라고 자처하는 자생공산주의자·자생혁명가들이 등장하고 이들이 실제로 청년학생 운동을 비롯한 반미·반정부 투쟁을 주도하는 상황이 되자 굳이 긴 시간을 들여 그들을 검증한 다음 순차적으로 포섭하는 방식을 고집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에 따라 북한 대남공작지도부에서는 주사파 등 국내 운동권 인물들에 대한 포섭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꾸기로 했다. 당시 북한 대남공작지도부가 선택한 포섭 공작 전술은 남파 공작원들이 포섭 대상에게 접근해 자신의 신분을 확실하게 밝히고 설득하는 방식이다. 말하자면 북한에서 포섭 대상으로 선정해 가지고 나온 해당 인물을 만나 자신이 북한에서 김정일의 특명을 받고 파견된 사람이라는 것을 밝히고 북한과 협력해 변혁 운동과 통일 운동을 하자고 설득하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 먼저 북한 공작지도부에서는 주사파 포섭 공작을 위해 남파되는 공작원들의 나이와 경력 및 경험, 그리고 포섭 대상의 나이와 운동 경력 등을 감안하여 직급과 권한을 부여하도록 했다. 북한 공작지도부는 1980년대 후반 이후 남한에 침투하는 공작조 조장들에게 최상위인 김정일 특사를 비롯해 노동당 대표(당대표)·노동당 연락대표(당 연락대표)·노동당 연락원 등의 순으로 직급을 부여했다
 
구체적으로 남파 공작조 조장의 나이가 50대 이상이면서 남한에 침투한 후 나이가 많고 경륜이 있는 인물을 상대해야 할 경우에는 김정일 특사또는 노동당 대표의 직급을 부여했다. 남파 공작조 조장의 나이가 30·40대이고 포섭 대상도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일 경우  공작조 조장에게 노동당 대표또는 노동당 연락대표의 직급을 부여하고 남파 공작조 조원들에게는 연락원의 지위를 부여했다.
 
그러나 포섭 공작을 위해 남파되는 공작조 조장들에게는 위와 같은 직급과 관계없이 남한 현지에서 포섭대상을 노동당에 직접 입당시킬 수 있는 특별 권한을 부여했다. 사실 북한에서는 김정은(과거에는 김일성·김정일)을 제외한 그 누구도, 그가 설사 장관이라도 독자적으로 노동당 입당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남한에 침투하는 공작조 조장들에게 직급에 있어서는 김정일 특사로부터 연락대표 등으로 차등을 두었으나 성공적인 포섭 공작을 위해 북한에서의 장관급보다 더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는 등 파격적인 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김정일은 대남공작부서 간부들에게 “수령님(김일성)의 권위를 가지고 남조선혁명을 완수하고 조국통일도 실현해야 한다”며 대남 공작에 김씨 일가의 지위와 업적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을 강조했다. 1980년대 중반에 들어와 국내 운동권 내에서 김일성·김정일을 지칭해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친지김동(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이라고 칭송한다는 보고를 받은 김정일이 그것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내린 지시였다.
 
 
▲ 2022년 8월15일 서울 광화문 세종대로 일대에서 ‘자유통일 주사파 척결 8·15 일천만 국민대회’가 진행됐다. 연합뉴스
 
 
그래서 남한에 침투한 공작조가 포섭 공작을 할 때 “나는 북에서 직접 김정일의 지시를 받고 파견된 특사다” 또는 “김정일의 특명을 받고 파견된 당대표다”는 식으로 자신을 소개하도록 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의 기를 꺾어 놓은 다음 “당신을 찾아가 협력해 보라는 김정일의 특명을 받고 왔다”며 설득하는 방식으로 포섭 공작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것은 한마디로 김일성·김정일이란 이름만 대면 남한의 운동권 인사들이 무조건 고개 숙이고 북한 편에 설 것이라는, 대단한 착각에서 출발한 오판이었다.
 
국내 운동권이 추종했던 한민전… 실체 없는 위장 조직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남한 내에 주사파가 존재한다는 사실, 특히 주사파가 북한과 연계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없고 오히려 북한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면서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닌다는 소식을 듣게 된 북한 대남공작부서 간부들은 상당히 고무되었다
 
주사파에 대한 북한의 기본적인 인식은 신문이나 방송 등 언론매체를 통해 북한이 투쟁 지침이나 방향 등을 제시하면 그것을 받아 그대로 수행하는 충실한 집행자, 노동당 대남공작지도부가 북한 편으로 끌어들여 지도해야 할 대상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한편, 주사파가 실체도 없는 한국민족민주전선(약칭 한민전)을 추종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북한은 1968824일 남한의 중앙정보부가 김종태와 최영도 등 통일혁명당 창당을 기도하던 주요 인물들을 검거했다고 발표하자 다음 날인 825“통일혁명당이 창당되었다”고 일방적으로 선포하고 통일혁명당이 남한 내에 실존하는 조직인 것처럼 선전했다. 물론 김종태·최영도 등과 함께 통혁당 창당을 위해 활동했던 잔여 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인적 역량이나 당시 조성되었던 정세를 볼 때 통혁당을 창당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 후 북한은 통혁당 잔여 세력을 규합해 통혁당과는 별개로 새로운 지하당조직(간첩망)을 만드는 한편, 평양에 통일혁명당 목소리방송을 운영하는 칠보산연락소를 만들어 통혁당 명의로 대남 선전선동 방송을 내보냈다. 북한은 그런 방식으로 통혁당이 남한에서 실제로 활동하는 것처럼 위장한 것이다
 
1970년대에는 대남 공작원들을 국내에 침투시켜 도(단위 지역에 통일혁명당 하부 조직 형태의 지하당조직(간첩망)을 구축하기 위한 공작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그러나 이는 북한 공작지도부가 통혁당이 실제로 남한에 존재하는 것처럼 위장하기 위한 전술의 일환이었을 뿐 김종태·최영도가 만들려고 했던 통혁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별개의 지하당조직, 즉 간첩망이었다.
 
북한은 통일혁명당의 명칭을 이용한 대남 지하당조직 공작이 한계에 부딪히자 1985727일 통일혁명당의 명칭을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으로 바꾸었고, 2005323일에는 또다시 반제민족민주전선(반제민전)’으로 개칭하기도 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김종태·최영도 등이 검거된 1968년 이후 대한민국에 통일혁명당이라는 실체적 조직은 존재한 적 없다고 분명히 얘기하고 싶다. 물론 통혁당의 후신이라고 하는 한민전이나 반제민전 역시 실체가 없는 빈껍데기 위장 조직에 불과하다. 그래서 남한의 주사파가 한민전을 추종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실소를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북한 공작지도부, 주사파를 등급 매겨 관리 
 
한편 북한 공작지도부에선 국내 주사파를 포섭하는 대남 공작을 하려고 해도 그들에 대한 자료가 별로 없는 것이 큰 걸림돌이었다. 북한 공작지도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미 북한에 포섭되어 국내에서 간첩 활동을 하고 있는 지하당조직에 지령을 내려 주사파 관련 정보를 수집해 보고하도록 하는 한편, 북한에 들어오는 남한의 신문과 잡지·라디오·TV ·각종 서적 등을 통해 관련 자료를 축적하고 분석했다.
 
당시 주사파 관련 자료 수집을 위해 많이 보고 참고했던 자료는 대한민국의 각계 운동 역사를 정리해 놓은 것으로, 운동권 인사들의 이름이 나오는 청년학생운동사·노동운동사 등 서적과 운동권 출신들이 만들었던 ’ ‘과 같은 월간지였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파악하고 축적한 자료에 기반하여 포섭할 만한 대상을 선별하고 분류하는 작업도 동시에 추진했다. 중요한 것은 북한 공작지도부가 국내 운동권 인물을 평가할 때 주사파라고 해서 똑같이 취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내 운동권 인물들의 사상 성향과 운동 경험 및 경력, 운동권 내에서의 지위와 역할 등을 감안해 각각 A·B·C 등으로 등급을 분류해 놓고 관련 자료를 지속적으로 축적했다
 
예를 들면 통혁당 총책이었던 김종태와 같이 조직을 만들고 지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출중한 인물은 A급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이었던 김근태와 같은 인물이 B, 청계피복노조 활동을 하다 분신한 전태일과 같은 인물은 C급으로 분류했다.
 
청사포 침투 공작조가 바꿔 놓은 적구화 교육
 
198510월 부산 청사포 해안을 통해 남한에 침투했다가 1987년 가을에 복귀한 공작조의 조언에 따라 적구화 교육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적구화 교육이란 모든 대남 공작원들에게 한국의 말과 문화를 배우게 함으로써 완벽한 한국인으로 만드는 것인데 그 교육 과정에서 서울말을 배우는 비중이 증가한 것이다.
 
1987년 당시 적구화 교육을 이수하는 남파 공작원 가운데 70~80% 정도는 경상도 말을 배우고 있었고 나머지 20~30%가 서울말을 배웠다. 그런데 청사포 침투 공작조가 복귀한 후 위와 같은 상황이 역전되어 남파 공작원의 70~80%가 서울말을 배우고 나머지 20~30%가 경상도 말을 배우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 청사포 침투 공작조가 실제로 한국에서 2년간 살면서 표준어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그것을 공작지도부에 보고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적구화 교육 기간에 모두 경상도 말을 배우고 남한에 침투한 후에는 공작 활동 지역인 대전·청주 등 중부 지역에서 2년간 생활하다가 북한으로 복귀했다. 그런데 북한에서 경상도 말을 배우고 남한에 침투했던 이들이 북한으로 복귀할 때는 모두 서울말, 즉 표준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남공작부서 간부들에게 “경상도 말을 배우고 남한에 침투해 생활하는 경우 경상도나 서울 지역에서는 그나마 괜찮은데, 전라도나 충청도 지역에서 생활할 때는 경상도 말을 쓰는 것이 상당히 불편했다. 그래서 우리는 남한에 침투한 후 라디오와 TV를 계속 듣고 보면서 표준어를 꾸준히 연습해 경상도 말 대신 표준어를 사용했다. 그랬더니 어느 지역엘 가도 큰 불편함이 없었다. 따라서 남파 공작원들이 특정 지역 언어보다 표준어를 배운 다음 남한에 침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판단된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되자 북한 공작지도부에서는 적구화 교육을 이수하는 남파 공작원들에게 가급적이면 서울말, 즉 표준어를 배우게 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그런데 막상 다수의 공작원들에게 서울말을 가르치려다 보니 서울말을 하는 서울 출신, 표준어를 가르칠 수 있는 경인 지역 출신 강사가 부족한 것이 걸림돌이었다. 그래서 북한 공작지도부에서는 서울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다가 해외를 거쳐 월북한 지 얼마 안 된 서울 출신의 김원석·호경옥 등을 급하게 서울말을 가르치는 적구화 교육 강사로 영입하기도 했다.
 
 
프로필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졸업
노동당중앙위 대외연락부 남파공작원으로 15년 활동(1981~1995)
-19901차 침투 후 이선실 대동 복귀·간첩망 구축 등 공작임무 수행 후 복귀. 공화국영웅 칭호 및 국기훈장 제1급 수여
-19952차로 남파되어 간첩망 구축·거물 간첩 접선 등 임무 수행하다 검거
국군기무사령부(현 방첩사) 분석관(1999~2006)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2008~2020)
경남대 북한대학원 북한학 석사
북한대학원대학교 북한학 박사
유튜브 김동식의 북한S파일운영
대북전략컨설팅 대표
 
저서
박사논문 북한의 대남혁명전략 전개와 변화에 관한 연구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기파랑, 2013)
북한 대남전략의 실체’(기파랑,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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