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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6> 철학 원리·사회 역사 원리·수령영도론까지도 전부 허구
마르크스 공산주의·주체사상, 그 허망한 신기루의 종착지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3-26 00:01:24
  
▲ 조정진 편집인·북한학 박사
3. 수령영도론과 수령의 신격화 비판
 
사회 역사 원리의 다음 항목인 ‘주체사상의 지도적 원칙’(이하 ‘지도 원칙’), ‘주체사상의 역사적 의의’ 등을 비판할 차례이지만, 여기서는 그것을 일일이 비판하는 것은 생략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소위 ‘지도 원칙’과 ‘주체사상의 역사적 의의’가 모두 철학 원리와 역사 원리를 근거로 하고 있어서 그 역시 허구요 억지 주장이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는 이 두 가지 원리가 앞서의 철학 원리나 역사 원리를 근거로 하여 남·북한의 ‘인민대중’을 주체사상으로 무장시킨 뒤 그들의 정신을 완전히 ‘틀어쥐어서’ 언론의 자유는 물론 사고의 자유조차 갖지 못하게 하여 완전히 김일성의 꼭두각시로 만들기 위한 책략 이론에 불과하다는 것만을 지적해 둔다.
 
그리고 여기서는 다음 세 가지 점에 관해서만 다루기로 한다. 첫째, 수령영도론으로 본 사람중심론 및 주체사상의 허구성 둘째, 민족적 애국심의 위장성 셋째, 사상 형성의 시기로 본 주체사상의 허구성 등이다.
 
(1) 수령영도론으로 본 사람중심론 및 주체사상의 허구성
 
주체사상에는 ‘역사 원리’의 항목하에 “… 인민대중이 혁명 운동·사회주의 운동을 수행하려면 지도가 필요하며 그것이 바로 당과 수령의 영도이다”(18쪽), “노동계급의 당은 혁명의 참모부이며, 근로계급의 수령은 혁명의 최고 영도자다”(18쪽), “인민대중이 혁명적으로 의식화·조직화되어 역사적 혁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당과 수령의 영도를 받아야 한다.”(18쪽)
 
또 ‘주체사상의 지도적 원칙’의 항목에서 “주체의 혁명관에서 핵을 이루는 것은 당과 수령에 대한 충실성이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위업은 수령에 의해서 개척되며 당과 수령의 영도 밑에 수행된다”(65쪽)는 등의 말도 보인다. 이 인용문들의 내용은 보통 수령영도론으로 알려져 있다.
 
이 인용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인민대중은 반드시 근로대중의 수령이요 최고 영도자인 김일성의 지도를 받아야 하며, 그에게 절대 충성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주체사상의 철학 원리와 역사 원리의 내용과는 모순되는 주장이다. 무릇 ‘원리’란 ‘모든 사물이나 현상에 해당되는 보편타당한 원칙’을 말한다.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가 참으로 ‘원리’(철학 원리)라면 언제 어디서나 이 명제가 타당해야 한다. “인민대중이 사회 역사의 주체”이며(15쪽), “인류 역사는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의 역사”이며(19쪽), “사회 역사적 운동이 인민대중의 창조적 운동”이며(23쪽), “혁명투쟁에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인민대중의 자주적 사상 의식이다”(31쪽)는 명제가 모두 원리(‘사회 역사 원리’)인 이상 언제 어디서나 이 명제들은 보편타당해야 한다.
 
그런데 만일 인민대중은 특정인인 김일성 수령의 영도를 반드시 받아야 하고 또 그에게 충실성을 보여야 한다는 수령영도론이 참이라고 한다면, 위에 말한 사람중심의 철학 원리나 역사 원리(주체사상)는 보편타당한 진리가 될 수 없는 비원리요 비진리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첫째로, 매사에 수령의 지도를 받아야만 한다면 인민대중이 사회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 수령만이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수령의 지도를 꼭 받아야 한다는 말은 수령의 지도에만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말이 되어 인민대중은 자주적인 활동을 할 수 없게 됨을 뜻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수령의 영도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말은 인민대중이 창조적 활동을 함에 있어 수령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는 말이 되어 인민의 창조적 활동이 창의에 의한 자율적인 활동이 아니라 모방에 의한 타율적인 활동이 되기 때문이다.
넷째로, 수령의 영도를 꼭 받아야 한다는 말은 자의에 따라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활동하는 것이 되어 ‘인민대중의 자주적 의식, 즉 사상 의식’이 기능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2) 수령의 신격화로 본 수령영도론의 허구성
 
이와 같이 수령영도론과 철학 원리 또는 역사 원리는 내용상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단 한 가지 경우에만 양립할 수 있으니 그것은 수령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신성불가침의 신으로 보는 경우이다. 즉 그를 신격화하는 것이다. 수령을 신격화하면 그는 주체가 되고 인민대중은 그 신 앞에 서는 대상이 되지만, 사회 역사의 발전에 있어서는 인민대중은 모두가 평등하게 주체가 될 수 있어서 두 이론이 양립하게 된다. 마치 기독교의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평등’ 사상과 같다 하겠다.
 
이것은 신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대상이며 평등하나, 만물에 대해서는 누구나 주관의 주체가 된다는 뜻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령을 신으로 격상해 놓으면 그 신 앞에 ‘사람’이나 ‘인민대중’은 대상이 되지만, 자연만물 즉 ‘모든 것’에 대해서는 주인이요 주체가 될 수 있어서 수령영도론과 사람중심론이 양립할 수 있게 된다.
 
김일성은 엄연히 김형직의 아들이요, 김정일의 아비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인간이다. 그가 신일 수는 절대로 없다. 게다가 무신론자이다. 그런데 인간이 신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지만, 특별한 경우, 즉 특수 인물인 경우 ‘신의 현현체’로서 존경받을 수는 있다. 헤겔은 예수님을 ‘신인(神人)’ 또는 ‘신의 현현체’라고 표현했으며, 로마의 교황도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숭앙받고 있어서 일종의 신격화된 존재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신의 실존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은 철저한 무신론자요, 일찍이 북한의 수많은 종교 지도자를 숙청한 장본인이다. 이러한 그에게 신격화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스꽝스러운 것은 인민대중이 김일성의 영도를 받아야만 역사 발전의 주체가 되는 것이라면, 김일성의 영도를 받지 못하는 외국의 인민대중이나 이미 지나간 과거 시대의 인민대중은 역사 발전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말이 되어서, 그 자신의 ‘인민대중이 역사 발전의 주체’란 말 자체가 성립 불가능의 자가당착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주체사상의 철학 원리도, 사회 역사 원리도 그리고 수령영도론까지도 전부 허구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3) 민족적 애국심의 위장성
 
주체사상에선 민족을 중시하고 민족적 주체성을 강조하면서 민족 감정에 호소하는 듯한 발언이 가끔 눈에 뜨인다. 예컨대 “미제 침략자들의 앞잡이들이 부식한 미제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은 민족적 계급적 각성을 마비시키고 우리 민족의 귀중한 문화산물과 미풍양속을 짓밟는 가장 유해로운 사상적 독소가 되고 있다”(42쪽), “사상에서 주체를 세우기 위해서는 높은 민족적 자존심과 혁명적 자부를 가져야 한다”(39쪽), “사상에서 주체를 세우기 위해서는 민족문화를 발전시키고 대중의 문화기술 수준을 높여야 한다”(40쪽), “신흥세력의 나라들과… 협력을 강화하고 단합된 힘으로 투쟁을 벌인다면… 민족적 존엄과 생존권을 지킬 수 있다”(50쪽), “민족적 형식에 혁명적 사회주의적 내용을 가진 문화”(40쪽), “사회주의적 민족문화를 건전하게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제국주의적 문화 침략을 철저히 막아 내는 한편… 그의 한 전통을 옳게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40쪽), “자기 나라를 알아야… 자기 조국과 인민을 열렬히 사랑하고 애국적 헌신성과 혁명적 정열을 높이 발휘할 수 있다”(39쪽) 등이다.
 
이상의 인용문을 보면 김일성은 사회주의자요 공산주의자이면서도 훌륭한 애국자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위의 인용문 속에 ‘민족적 자존심과 자부심’ ‘민족의 귀중한 문화유산과 미풍양속’ ‘민족적 존엄과 생존권’ ‘조국과 인민에 대한 열렬한 사랑’ ‘애국적 헌신성과 정열’ 등의 민족적 감정과 애국심을 유발하는 용어들이 쓰여 있기 때문이다.
 
과연 김일성은 애국자일까? 주체사상은 진심으로 민족주의적 애국심에 호소하고 있으며 민족의 문화유산을 귀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김일성의 과거를 아는 인사들이라면 누구나 김일성이 민족적이니 애국심이니 문화유산의 귀중함이니 하는 것은 모두 거짓이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6·25를 체험한 연령층, 특히 이북에서 월남한 수많은 인사는 김일성이 그때까지 북한에 있던 수많은 민족주의자·애국자·목사·장로 등의 종교인·지식인·언론인을 대량으로 학살한 사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문화재로서의 여러 교회당과 사찰을 집회장소나 창고로 사용한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6·25를 체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는 남한 사회의 비리와 모순과 병폐 등에 의분심을 느낀 나머지 그 반작용으로 김일성의 ‘민족적 애국심’에 대한 호소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음은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다음에 김일성의 소위 민족적 존엄이니 민족적 긍지니 민족적 애국심이니 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며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가를 설명하기로 한다.
 
원래 마르크스가 제창한 공산주의는 원칙상 민족주의를 용인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는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으며’ 국경을 넘어서 ‘만국의 프롤레타리아는 단결’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공산당선언)에 따라서 본질상 국제주의이기 때문이며, 그 이념에 있어서 민족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 해방을 이념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민족적 동질성을 터로 하고 민족적 생존과 발전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민족주의와는 일치될 수 없다. 그러니 공산주의자가 되려면 민족주의를 버려야 하고, 민족주의자가 되려면 공산주의를 포기해야 한다. 이것이 본래 공산주의의 기본 입장인 것이다.
 
그럼에도 김일성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공산주의자이면서 민족주의자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으니 그의 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것은 남·북한 국민 대중의 민족 심리와 민족의식을 혁명투쟁에 이용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것은 그가 민족 의식, 즉 민족적 연대의식이 계급의식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의 마지막 부분에서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고 외쳤는데, 이때 그는 계급의식이 민족의식보다 강한 것으로 보고 있었다. 왜냐하면 한 민족은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는 적대 관계로 구성되어 있어서 두 계급의 이해관계가 일치할 수 없다. 그러나 여러 자본주의 국가들의 노동자(프롤레타리아 계급)끼리는 서로 착취당하는 입장이어서 이해관계가 일치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에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했을 때 실증되었다. 즉 민족의식이 계급의식을 능가한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당시의 제2 인터내셔널(국제사회주의자회의)의 각국 대표들은 각국의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전쟁 도발을 저지하기로 약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터지고 나니 각국의 대표들(특히 독일과 프랑스의 대표들)은 모두 자국의 정부 편에 서서 전쟁을 지지하고 나섰던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민족적 애국심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진 것이다. 이것은 민족의식이 계급의식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인 것이다.
 
이 사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국제적 연대의식이 민족의식을 능가하리라고 믿었던 마르크스의 판단이 오판이었음을 보여준다. 스탈린 사후 그때까지의 모스크바 중심의 국제적 공산주의 운동이 산산조각으로 분열되어 각국마다 독자노선을 추구하기에 이른 원인 중의 하나도 바로 이 계급의식을 압도하는 민족 심리와 민족의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창시한 공산주의가 오늘날 실패하지 않을 수 없었던 원인 가운데 하나도 또한 민족의식의 강도에 대한 마르크스의 오판에 있었던 것이다.
 
민족의식의 이 같은 강인성을 재빠르게 사회주의국가의 방위에 이용한 것이 스탈린이었다. 그는 2차 대전 때 히틀러의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해 오자 범슬라브적인 민족 감정에 호소하여 전 러시아인을 효과적으로 단결시킬 수 있었다. 외국에 살던 백계 러시아인 중에서도 조국의 방위에 참가하는 자가 있었다.
 
민족 심리를 이용한 것은 마오쩌둥도 마찬가지였다. 마오쩌둥은 1934년부터 1936년까지 국민당정부군(장개석군)에 쫓기고 있었다. 소위 ‘대장정’을 거쳐 연안에 도착한 그는 장개석군의 최후 토벌에서 벗어나기 위해 때마침 일본군의 침략 앞에서 항일을 외치는 국민 여론을 등에 업고 내전 중지와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을 강력히 주장하고 선전했다. 드디어 그는 1937년 제2차의 국공합작을 성취시켰는데, 이것도 국민의 애족심·애국심에 강력히 호소함으로써 얻어진 성과였다.
 
그런데 국민당 정부와 합작 후 대일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마오쩌둥은 공산당의 장기인 통일전선전술(상층 통일전선전술과 하층 통일선전술)을 광범위하게 구사했다. 그리하여 대일(對日)전이 끝날 무렵에는 부정부패로 민심을 잃은 국민당 정부의 요인들 및 군 장성들을 국민 및 병사들로부터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드디어 대륙 전체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마오쩌둥의 전술이 주효한 것은 물론이지만, 관료들과 군 장성들의 비리를 규탄하는 국민 대중의 애국심에 불타는 민족의식이 마오쩌둥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승리한 마오쩌둥은 1949년 정부 수립에 앞서 대륙에 남아 있는 여러 ‘민주당파’(장개석 정권과 국민당을 반대한 전체의 정당 사회단체 및 개인을 이렇게 지칭)와 저명한 인사들을 향해 정부 수립에 참가하도록 호소했다. 그러자 전쟁 중에 각계각층이 합심해서 마오쩌둥을 지지해 준 데 대한 보답인 것처럼 느껴져서 전체 국민은 마오쩌둥에게 감사의 환호를 보냈다.
 
그리하여 1949년 10월1일, 드디어 중국 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런데 그 후 일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사태는 의외의 방향으로 진전되어 갔다. 정부 수립에 앞서서 신정부 수립에 참가하라는 호소에 따라서 여러 직책에 각각 채용되었던 민주당파의 지도자·민족자본가·학자·작가·예술가·언론인·그 밖의 인텔리들을 비롯한 수많은 인사를 적대적인 우파분자로 몰아 일선에서 추방하는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이것이 1957년의 명방운동(鳴放運動·‘백가쟁명(百家爭鳴)’ ‘백화제방(百花齊放)’운동)을 발단으로 한 반(反)우파투쟁이었던 것이다.
 
명방운동, 즉 백가쟁명·백화제방 운동은 정부나 당의 시책에 대해 기탄없이 비판을 가하고 의견을 개진해도 좋다는 언론자유화 정책이었다. 적어도 국민은 그렇게 알고 문자 그대로 기탄없이 비판을 가했다. 그런데 ‘언론의 자유’를 얻은 대부분의 당외 인사들은 이 비판에서 정부와 공산당과 공산주의를 반대했다. 이유는 약속과 다르지 않느냐는 것이었으며 사회주의를 집어치우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시행하라고 촉구하였던 것이다. 마오쩌둥의 ‘신민주주의론’(1940)으로써 참된 자유와 참된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줄 알고 마오쩌둥을 지지했던 많은 민주인사들은 결국 배신당한 분함을 참지 못하고 언론자유화의 기회를 통해 신랄하게 정부와 당을 비판했다.
 
그러나 민주인사들은 아무도 명방정책이 적성분자 색출을 위한 고도의 계략이었던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 때문에 불평분자의 정체와 ‘반공’ ‘반모’ ‘반당’의 지식인의 정체가 남김없이 노출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이에 모택동의 우파에 대한 대숙청과 대추방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명방운동을 시발점으로 해서 전개된 반우파 투쟁이다.
 
이 운동에 의해 학살된 사람은 무려 20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절대다수의 국민 대중의 애국심과 반일적인 민족 감정을 오로지 세력 확대와 정권 탈취에 이용하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마오쩌둥은 처음부터 공산주의자였으며 결코 민족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자신을 민족주의적 개량주의자인 것처럼 위장했던 것이다.
 
왜 이런 일이 가능하였느냐 하면, 공산주의는 본질상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인 동시에 권력탈취주의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입장에서 볼 때 민족주의는 민족부르주아 계급 중심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며 따라서 민족적 감정이니 애국심이니 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이용의 대상은 될지언정 존중의 대상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오늘날 김일성이 최고의 민족적 지도자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민족적 애국심에 호소하는 언동을 취하는 것은 40여 년 전 마오쩌둥이 장개석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국민 대중의 민족적 애국심에 호소한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마오쩌둥이 집권한 뒤 중국의 역사는 무엇을 보여 주었는가? 그것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경제를 파탄에 빠뜨리게 하는 주의요, 참 자유와 참 민주주의를 압살하는 주의라는 것이었다. 또 사회주의가 완전 실패하였음을 보여 준 것이다. 그렇게 실패한 사회주의를 대한민국에 실시하겠다고 선전하고 있는 것이 주체사상인 것이다.
 
마오쩌둥이 ‘신민주주의론’이라는 위장 이론으로 대중의 지지를 얻어낸 것처럼, 김일성은 ‘주체사상’이라는 위장 이론으로써 대한민국의 젊은 층과 학생층을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김일성의 애국심의 위장성은 그가 일찍부터 모든 성씨의 족보와 종친회를 없애 버리고 북한 동포를 ‘족보 없는 국민’ ‘뿌리 없는 백성’으로, 따라서 조상을 숭배할 줄 모르는 백성으로 만들어 놓은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조상을 숭배할 줄 모르면서 어떻게 조상이 남긴 전통문화를 계승할 수 있겠는가?
 
이상으로 김일성의 민족적 애국심도 전적으로 허구요 위장성임이 밝혀졌으리라 믿는다.
 
(4) 사상의 창시와 형성의 시기로 본 주체사상의 허구성
 
다음은 주체사상이 언제 창시되었으며 창시 이후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 내용이 구체화되고 형성되어 왔는가에 대해서 알아봄으로써 주체사상이 허구임을 또다시 밝히려고 한다. 김정일 저 ‘주체사상에 대하여’와 그 밖의 몇몇 북한 관계의 연구논문을 근거로 이를 알아보기로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밝혀둘 것은, 무릇 어떤 사상이든 반드시 창시와 형성 과정과 완성의 3단계가 있다는 것과, 그 3단계가 반드시 육하원칙에 일치하는 객관적 사실에 의해서 혹은 제삼자의 조사에 의해서 확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예로 마르크스의 경우를 들어보기로 한다.
 
1) 마르크스 사상의 경우
 
마르크스 사상의 경우, 그의 사상 창시는 파리 시대를 전후해 논문들이 쓰여지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형성 과정은 브뤼셀 시대와 런던 시대의 초기(즉 ‘공산당선언’ 발표에서 ‘경제학 비판’ 출판 시기)까지이며, 완성기는 ‘자본론’ 저작의 시기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 자신은 명확히 3단계를 구분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의 사상이 라인신문의 주필직을 사퇴하고부터 파리 시대를 거치는 동안에 사상의 기초가 다져졌고, 그 후 파리에서 다시 추방당해 브뤼셀에 이르러 더욱 사상이 발전하여 런던에 이르기 직전의 ‘공산당선언’에서 그동안에 형성된 내용을 일단 정리해서 발표했다는 것과, 그 후 런던에 이르러 다시 연구를 계속하여 ‘경제학 비판’을 거쳐 드디어 불후의 대작인 ‘자본론’을 집필하였다는 것은 마르크스 자신이 밝히고 있는 바이다. 또 실제로 그때그때의 객관적 사실들이 마르크스의 말이 육하원칙에 맞음을 방증해 주고 있다. 그리고 마르크스 연구가들도 연구를 통해 마르크스가 언급한 저작들을 실제로 확인했다.
 
2) 김일성주체사상의 경우
 
김일성주체사상도 사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의 예에서와 같이, 몇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즉 첫째로, 사상의 창시와 형성 과정과 완성의 3단계가 있어야 하고 둘째로, 육하원칙에 부합하는 객관적 사실에 의하여 그것이 방증될 수 있어야 하는 동시에 제삼자인 학자들의 연구에 의한 확인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김일성의 주체사상은 그렇지 못하니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① 주체사상은 창시부터 이러한 조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김정일의 말에 의하면 주체사상 창시의 시점은 1930년 6월 만주의 카륜에서 열렸던 공청 및 반제청년동맹 지도간부회의이다. 그때 처음으로 주체사상의 원리가 발표(천명·闡明)되었다고 한다(7쪽). 그러나 이것을 뒷받침할 만한 객관적·역사적 사실이 전무하며, 학자의 연구도 그 사실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전 조총련 산하 조선대학의 교육담당이었던 허동찬 교수는 그의 저서 ‘김일성 평전’에서 카륜회의에 참가했다는 공청 및 반제청년동맹이 모두 유령 조직이었다는 것과, 따라서 그 회의에서 주체사상이 천명되었다는 것도 가공의 사실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리고 카륜회의 운운은 “전부 날조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고 결론짓고 있다.
 
② 다음은 사상의 형성 과정이란 점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상술한 바와 같이 마르크스는 그의 사상 형성의 3단계 과정을 통해 여러 편의 저작을 남겼는데, 새로운 저작이 나올 때마다 사상 내용이 점점 더 풍부해지고 더 구체화되어 가서 문자 그대로 미숙에서 성숙으로 성장되어 갔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의 주체사상의 경우에는 김정일의 발표대로라면 이와 같은 사상의 형성 과정이 전혀 없다.
 
주체사상은 김일성이 18세 되던 1930년 카륜회의에서 처음 발표(천명)되었다는 것인데 그때 이미 완벽한 ‘주체사상의 원리’로서 천명되었으며, 그 때문에 이 사상의 선포는 ‘역사적 대사변’이었다고 찬양하고 있다.(7쪽) 이러니 망발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신의 계시에 따르는 종교 교리 같은 것은 발전이나 형성의 과정이 없는 것이 보통이지만, 적어도 사상 체계라고 한다면 반드시 형성 과정·성숙 과정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김일성은 특히 무신론자요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에 주체사상은 더욱이나 처음부터 완벽한 것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주체사상이 교리형의 완전 진리로 발표된 것처럼 꾸미고 있으니 문자 그대로 날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③ 다음은 주체사상이 1930년에 창시되었다는데 이에 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김일성은 1955년에 처음으로 인민대중 앞에 공식적으로 ‘사상 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하는 데 대하여’라는 주제하에 교시의 형식으로 자신의 사상을 발표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시기와 실제의 객관적 자료와의 사이에는 현격한 불일치가 있는 바, 이에 대해 언급하기로 한다. 
 
이명영 교수의 ‘권력의 역사’에 의하면 1955년 12월28일에 개최되었다고 하는 ‘조선노동당 선전선동일꾼 모임’에서 김일성은 상기의 긴 주제의 연설을 통해 새삼스럽게 주체를 주장하고 나섰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기록이 1960년 5월에 새로 간행된 ‘김일성선집’ 제4권에 처음으로 실렸다는 사실이다. 그나마 주체사상의 ‘내용’이 아니라 ‘주체 확립의 필요성’에 대해서였다.
 
여기서 첫째로 의문이 가는 것은 주체사상이 그렇게도 훌륭한 진리요, 그 발표가 ‘역사적 대사변’이었다면 1930년 이후 25년 동안 왜 한 번도 주체사상에 대한 언급이 없었느냐 하는 것이다. 둘째로, 1955년 12월28일에 진실로 선전선동일꾼 모임이 열렸다면 왜 당시 그 소식이 신문(로동신문)에 보도되지 않았으며, 해마다 김일성의 연설을 수록 발표하는 ‘조선중앙연감’에도 어째서 실리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셋째는, 이미 1930년에 발표되었다는 ‘주체사상의 원리’ 속에 주체가 개념적으로 이미 확립되어 있을 터인데, 왜 새삼스럽게 1955년에 와서 주체 확립의 필요성을 거론하느냐 하는 것이다. 넷째는 선전선동일꾼 모임에서 주체사상에 관계된 사항을 발표했다면 이왕 말이 나온 김에 계속해서 ‘주체’의 개념을 다룰 것이지 어째서 거의 5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다루었으며, 그것도 ‘김일성선집’ 제4권에서만 다루었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주체사상에 관련된 발표에 관한 공식 언명이 마르크스의 경우와는 전혀 달라서 실제의 객관적 사실(자료)과는 전연 일치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마치 카륜회의가 날조였던 것처럼 이 선전선동 일꾼 대회도 날조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새로운 의문은 도대체 김일성은 무엇 때문에 그러한 날조를 일삼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루기로 한다.
 
④ 다음은 주체사상의 체계화의 실제적 시기와 주체사상 형성의 3단계에 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실제로 주체사상이 구체적인 내용을 갖추고 일반에게 선전되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인가? 다시 말하면 어느 정도 체계화된 내용을 갖추고 일반에게 선전되기 시작한 때는 언제인가? 그것은 1973년 이후로 보아 틀림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1972년 12월에 개정된 북한 헌법 제4조에 조선노동당은 주체사상을 그들 활동의 지도적 지침으로 삼는다는 새로운 규정을 넣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조선노동당의 주체사상이란 바로 김일성주체사상을 말함은 물론이다.
 
그런데 그 후 1973년부터 2년간 방송대학용 ‘철학강좌’가 실시되었는데 이 강좌에서 그 강좌 내용이 바로 김일성주체사상이라는 것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여기서 잠깐 일러둘 것은 보통 김일성주체사상이라는 것은 이미 처음에 소개한 바와 같이 철학적 내용(철학적 원리)을 갖춘 사상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러한 철학적 내용을 갖춘 사상강좌가 1973년부터 2년간 실시된 ‘철학강좌’, 즉 김일성주체사상의 강좌였던 것이다. 그 이전에 이미 주체사상이라는 용어는 쓰이기 시작했으나(예 : 1960년 5월에 발간된 ‘김일성선집’ 제4권) 아직도 이론으로 체계화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주체사상이 철학적 내용을 갖추기까지는, 즉 1973년이 되기까지는 두 개의 매듭, 즉 전환점이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 하나는 1956년 4월의 북한 노동당 제3차 당대회에서 ‘주체’라는 개념이 하나의 큰 문제의식으로 제기된 사실이요, 또 하나는 1966년의 8월12일자의 노동신문 사설을 통해 자주노선을 천명한 사실, 즉 ‘사상에서 주체, 정치에서 자주, 경제에서 자립, 국방에서 자위’라는 표어를 내용으로 하는 ‘자주 선언’이 발표된 사실이다. 이 두 가지의 전환점이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한 것은 그 두 매듭이 실질적인 김일성주체사상의 창시와 형성 과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1973년 경에 주체사상의 체계화가 실질적으로 완성된 것으로 볼 때, 그 완성을 향한 사상의 출발(창시)이 1956년에 ‘주체’가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등장한 때이며, 그 주체개념의 이론화 과정(형성 과정)의 집약적 표출이 자주 선언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김일성주체사상의 발표에도 마르크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창시와 형성과정과 완성의 3단계가 있음을 알 수 있게 되며, 주체사상의 실질적인 창시는 1930년 6월이 아니라 1956년 4월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주체사상은 김정일의 표현대로라면, 1930년에 이미 완벽한 진리로서 출현하였기 때문에 발전의 여지도 없는 종교 교리요 종교 신앙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위에서 본 바와 같이 1973년 경에야 주체사상이 완성되었다고 하면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그 3단계 과정과 함께 성장 발전을 촉진시킨 요인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그러면 다음에 새로운 소제목으로 그 요인들을 분석하기로 한다.
 
3) 주체사상의 실질적인 창시를 촉진시킨 요인
 
이 요인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재적인 요인이요, 다른 하나는 외래적인 요인이다. 먼저 내재적인 요인에 관하여 언급하기로 한다.
 
① 내재적 요인
 
1953년 6·25전쟁이 끝남으로써 북한의 남침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후 북한에서는 1956년까지 권력 투쟁이 계속되었다. 이것은 박헌영을 비롯한 국내파, 박일우를 비롯한 연안파, 허가이를 비롯한 소련 2세파, 그리고 김일성파 등 4대 정파간의 권력 투쟁으로서 이 권력투쟁에서 다른 3대 정파들은 모두 김일성 일파에 의해 대거 숙청되었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방식을 따라서 피의 숙청을 단행한 것이다. 그런데 공산주의의 독재자들은 ‘피의 숙청’을 단행함에 있어서 사전적으로나 사후적으로나 반드시 그 숙청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것이 관례이다.
 
스탈린의 피의 숙청을 합리화시킨 것이 스탈린주의요, 모택동의 피의 숙청을 합리화시킨 것이 모순론·실천론을 포함한 모택동 사상이었던 것이다. 피의 숙청을 단행한 김일성에게도 사후적으로나마 이 폭력적 방법을 정당화시키고 합리화시키는 이론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필요성이 바로 주체사상의 창시에 대한 하나의 촉진 요인이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재적 요인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주체사상의 창시는 먼저 사상 사업에서의 주체 확립의 필요성에 관한 연설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때 ‘주체’의 개념은 다른 정파들을 사대주의자·종파주의자로 몰고 자파를 정통파로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② 외래적 요인
 
다음은 외래적 요인에 대하여 언급하기로 한다. 6·25전쟁이 휴전되기 조금 전인 1953년 3월에 스탈린이 사망했는데 그의 죽음은 그 후의 공산세계 전체에 일대 변혁의 계기, 즉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바위처럼 굳게 뭉쳤던 것이 와해되기 시작하는 계기를 가져왔다. 그가 죽은 3년 후인 1956년 2월의 소련 제20차 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는 죽은 스탈린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가하여, 그를 ‘인류의 태양’인 신의 자리에서 일거에 인류 역사 이래 가장 흉폭한 살인범으로 격하시키는 동시에 그의 일인독재와 우상화 정책을 격렬히 비난했다.
 
게다가 또 하나 공산세계에 충격을 준 것은 스탈린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때까지 스탈린의 철학(변증법적 유물론)과 유물사관은 마르크스·레닌의 이론을 바르게 이어받은 정통적인 철학이요 사관이라 믿고 있던 전 세계 대부분의 공산주의 이론가들에게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은 놀라운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리하여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이 있은 후부터는 일인 독재나 개인 우상화에 반대하는 풍조가 급속히 확산되어 갔다. 동시에 마르크스·레닌의 철학과 사관에 대한 독자적인 재해석의 경향이 이론가들 사이에 나타나게 되어 소위 철학 논쟁이 전개되게 되었다. 모순 논쟁이니 ‘토대와 상부구조’ 논쟁 등이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이 논쟁은 일시 소련뿐만 아니라 중국과 동구 전체에까지 번졌던 것이다. 이리하여 공산주의 세계는 드디어 표준되는 이론의 부재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이러한 사태가 만일 북한 내에서 벌어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두말할 것도 없이 김일성 독재체제가 흔들리고 사상의 혼란이 벌어졌을 것이다. 1956년 2월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을  비판했을 당시 이미 이러한 사태가 반드시 북한에도 파급될 것을 감지한 김일성은 이에 대한 대책을 조속히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소련이나 중국의 조류가 북한에 들어오지 않도록 폐쇄 정책을 더욱 강화하면서 북한 인민의 ‘의식을 틀어쥐기’ 위한 사상적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위한 안성맞춤의 수단이 ‘주체’의 개념이었다. 두 독재자(스탈린과 모택동)의 사상이 아닌, 독자적·자주적 사상이라는 뜻을 함축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바로 ‘주체’라는 개념이었다.
 
1956년 4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제3차의 당대회에서 김일성이 “사상 사업 분야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바로 잡을 것”에 대해 언급한 데는 2개월 전에 있었던 소련의 제20차 당대회에서의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의 영향이 컸던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즉 제3차 당대회에서 ‘주체’를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삼기 시작했다는 것은 주체사상의 창시가 이 대회에서 싹텄다는 점에서 매우 의의 있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바꿔 말하면 이것은 소련의 제20차 당대회에서의 스탈린 비판이 북한의 주체사상 창시의 외래적 요인으로 작용하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4) 주체사상의 형성 과정을 촉진시킨 요인
 
사상은 그 창시뿐 아니라 형성 과정에도 일정한 요인이 작용하게 된다. 예컨대 마르크스에게 브뤼셀에서의 망명 생활이 그 사상의 형성 과정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과 같다. 김일성의 주체사상의 형성 과정에 있어서 그 형성을 촉진시킨 요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주로 중국과 소련의 관계 악화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중·소의 이념 분쟁과 국경 충돌이었다. 이에 관하여 다음에 설명하기로 한다.
 
① 중·소 이념 분쟁
 
이미 말한 바와 같이 1956년 2월의 제20차 당대회에서의 스탈린 비판 이후 철학 분쟁이 확산되어 갔는데 그중의 모순 논쟁이 결국 중·소의 이념 분쟁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모순 논쟁이란 발전이 투쟁에 의해서 이루어지느냐 조화에 의해서 이루어지느냐, 즉 발전이 적대적 모순에 의해 이루어지느냐 비적대적 모순에 의해 이루어지느냐의 논쟁인 것이다. 종래에는 마르크스·레닌·스탈린의 모순관에 따라 모순을 대립물의 투쟁으로 규정하고, 이 규정에 따라서 사회 발전은 반드시 계급투쟁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고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논법에 따른다면 사회주의가 확립된 후에는, 예컨대 소련의 경우 계급 대립이 없어졌기 때문에 발전이 정지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따라서 무계급 사회 또한 발전이 이루어지려면 어떤 형태로든 투쟁이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결국은 계급사회는 적대적 모순에 의해서 발전하지만, 무계급사회는 비적대적 모순에 의해서 발전한다는 데 잠정적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이기는 했으나 이것은 논쟁의 완전한 해결이 아니었다. 본래 모순의 개념은 자연계의 발전에 관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모순 논쟁의 본질은 자연계의 발전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투쟁이냐 조화냐, 또는 적대냐 비적대냐의 양자 중의 하나를 택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하간 이 논쟁이 나중에는 자본주의국가와 사회주의국가와의 관계가 적대적 모순이냐 비적대적 모순이냐의 논쟁으로까지 확대되어, 드디어 중·소의 이념 분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 이념 분쟁에서 소련의 흐루시초프는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과의 평화 공존을 역설했다. 그러나 중국의 모택동은 마르크스·레닌의 정통적인 모순 개념에 따라 자본주의를 타도하기 위해서 사회주의국가와 자본주의국가와의 투쟁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흐루시초프를 수정주의자라고 몰아붙였다. 이에 대해 흐루시초프는 앞으로 양 진영 간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핵전쟁일 수밖에 없는데, 핵전쟁이 일어나면 승자도 패자도 없이 모두 파멸할 것이라고 응수하면서 모택동을 교조주의자로 낙인 찍고, 사회주의 혁명은 의회 정치를 통해서 평화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중·소의 이념 분쟁이 노골화된 것이 1960년 4월이었다. 이때 중국 공산당이 먼저 소련 공산당과의 사이에 이데올로기상의 불화가 있음을 공표함으로써 양국 간의 이념 분쟁이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한 달 후인 1960년 5월에 김일성선집 제4권이 발간되었는데 거기에 김일성이 1955년 12월28일, 조선노동당 선전선동일꾼 모임에서 연설했다는 연설문 ‘사상 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하는 데 대하여’의 내용이 실렸다. 이 연설에서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원리들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조선의 현실에 맞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또 소련이나 중국을 배우되 무조건 따를 것이 아니라 조선 혁명에 유익하도록 배워서 오히려 민족적 전통과 유산을 잘 살려 나가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사상 사업에서 주체를 똑똑히 세우는 길이라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연설문에는 다음과 같은 김일성의 의지가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즉 첫째로, 북한은 앞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교조주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과 둘째로 소련이나 중국을 무조건 따르지 않겠다는 것, 셋째로 북한이 독자적인 주체의 입장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및 소련과 중국을 상대해 나가겠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김일성선집 제4권에는 이 연설이 이미 말한 것처럼 1955년 12월28일에 있었던 ‘조선노동당 선전선동일꾼 모임’에서 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대회는 가공적인 대회일 뿐 실제로 있었던 대회가 아니다. 이것은 그때까지 소련과 중국에 대하여 종속적 위치에 있었던 자신의 입장을 감추고, 오래전부터 독자성(주체성)을 고수해 왔다는 것을 내외에 과시하기 위해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 이전으로 소급해서 가공적인 유령 집회를 조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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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선전선동일꾼 모임 그 자체는 조작된 것이라 하더라도 김일성선집 제4권이 발간될 무렵의 김일성의 의지가 그 속에 나타나 있다는 사실이다. 즉 소련과 중국에 대해서 그리고 마르크스·레닌에 대해서까지, 무조건적으로는 또 교조적으로는 따르지 않고 자주성과 주체성을 가지고 상대하겠다는 의지가 ‘김일성선집’ 제4권에 극명하게 나타나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김일성선집’ 제4권이 발간된 1960년은 중·소 이념 분쟁이 드디어 표면화된 1960년 4월의 다음 달임을 유의할 때, 김일성의 이 의지의 표명은 중·소 이념 분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이로써 1956년 4월의 제3차 당대회에서 우선 ‘주체’가 확립(바로잡기)된 후, 그 4년 후인 1960년 5월에 그 주체의 개념이 더욱 구체화되고 자주성을 띠게 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김일성주체사상이 그 형성 과정에 있어 상당히 구체화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1966년의 자주 선언이었다. 이것은 1966년 8월12일자 노동신문 사설에서 ‘자주성을 옹호하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이 사설은 사상에서의 주체·정치에서의 자주·경제에서의 자립·국방에서의 자위 등 4개의 구호를 내걸고 그것이 당의 일관된 방침이라 했고, 그러한 방침을 자주 노선이라고 지칭했다(54). 그리고 이 구호들에 담길 주체에 관한 주장들은 같은 해(1966년) 10월5일의 당대표자 회의에서의 김일성의 ‘현 정세와 우리 당의 과업’이라는 보고를 통해 주체사상이라고 명명되었다.
 
1956년 4월 제3차 당대회에서의 ‘주체’의 확립과 함께 창시된 주체사상이 10년 후인 1966년 자주 선언의 발표에서 상당히 구체화되어서 사상적 주체·정치적 자주·경제적 자립·국방적 자위를 표어로 하는 단계로 형성되고, 그 해 12월16일 최고인민회의 제4기 제1차 회의에서 최고 정치강령으로 채택됨으로써 드디어 공식적으로 ‘주체사상’이라고 불리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사상이란 그 창시뿐만 아니라 형성 과정 또한 반드시 일정한 촉진 요인의 작용을 받게 된다. 주체사상의 창시에 있어서의 촉진 요인은 권력투쟁에서의 피의 숙청과 소련의 제2차 당대회에서의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이었다. 그렇다면 주체사상의 형성 과정에 있어서 창시 때의 주체와 개념이 더욱 민족적인 자주적 성격을 띠게 되고 더 나아가 주체(사상)·자주(정치)·자립(경제)·자위(국방) 등으로 확대되고 드디어 ‘주체사상’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요인은 무엇인가? 이 같은 사상 형성 과정에도 반드시 사회적·환경적인 촉진 요인이 작용했을 터인데 그 요인은 무엇일까?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김일성선집’ 제4권에서의 김일성의 자주적인 의지의 표명이 그 1개월 전의 중·소 이념 분쟁의 표면화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던 것처럼, 1966년의 4대 표어의 자주 선언에도 촉진 요인이 작용했는데 그것이 바로 중·소 국경 분쟁이었다.
 
② 중·소 국경 분쟁
 
1960년 4월에 표면화된 중·소 이념 분쟁은 점점 에스컬레이트되어 마침내 중·소 간의 국경 분쟁으로 확산되고 말았다. 이 국경 분쟁은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급기야 무력 충돌로 이어졌으며 이리하여 양국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때까지 소련과 중국의 두 상전 밑에서 이 눈치 저 눈치 살피면서 용케 줄타기의 처신을 해 오던 김일성으로서는 두 상전이 무력 충돌하는 상황하에서는 어느 한쪽 편에 가담할 수 없는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중립노선을 표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중립노선을 표방하는 것은 독재자의 위신 추락과 그동안의 기회주의적 처신이 노출되는 결과로 이어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중립노선을 취하되 독자노선 또는 자주노선의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국제적으로는 소련이나 중국과 대등의 입장임을 과시하면서, 국내적으로는 자신의 위신과 영도력을 더욱 강화하는 효과를 한꺼번에 올릴 수 있는 방안으로 내놓은 것이 소위 1966년 8월의 자주선언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자주선언의 동기는 어디까지나 중·소 관계의 악화였다. 양국의 무력 충돌을 기화로 그동안 이 두 나라에 매어 있던 굴레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입장을 취하고자 자주노선을 취했다는 것은 그동안 ‘스탈린거리’로 불리던 평양의 한 거리를 자주 선언 후 1968년에 ‘금수산거리’로 고쳐 부르고, 1970년에는 그동안 부르던 ‘모택동거리’를 ‘모란봉거리’로 개칭한 사실로도 알 수 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자주선언의 내용이란 4개 항목의 표어로서 ‘사상에서 주체’ ‘정치에서 자주’ ‘경제에서 자립’ ‘국방에서 자위’가 그것이다. 이 4개의 표어가 함축된 내용이 이론화되고 체계화됨으로써 철학으로서의 주체사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같은 해 10월5일의 당대표자 회의에서 이 표어에 담긴 주장을 ‘주체사상’이라고 처음으로 명명한 것이다. 이제 남은 일은 자신의 독재체제 유지 및 강화와 남한의 폭력 혁명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이 4개의 표방에 살을 붙여 가면서 철학적·역사적·사회적으로 이론화시키고 체계화시키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주체사상이 구체적인 내용을 갖추고 일반에게 공개되기 시작한 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1973년부터였다. 이것은 1966년 8월에 자주선언이 발표된 후, 그 자주선언에서의 주장을 이론화시키고 체계화시키는 데 6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음을 뜻한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1966년 8월에 자주선언을 발표해 놓고, 6년여의 기간에 걸쳐서 그 발표된 내용을 아마도 어용 철학자들을 시켜서 구체적으로 이론화하고 체계화함으로써 비로소 일반에 공개할 수 있는 정도의 사상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주체사상은 여전히 미숙한 점이 적지 않았다. 왜냐하면 가장 완벽하다고 하는 주체사상의 세부적인 내용이 실린 김정일의 ‘주체사상에 대하여’가 발간된 것이 1982년이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김일성주체사상의 실제 창시의 시기와 그 형성 과정에 대해서 고찰해 보았다. 그런데 그 창시와 형성 과정에는 반드시 촉진 요인이 작용하는 바, 창시 과정에서의 촉진 요인은 국내의 피의 숙청과 대외적인 스탈린 비판 후의 철학 논쟁이었다. 그리고 형성 과정에 서의 촉진 요인은 중·소 국경 분쟁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1930년 김일성이 18세 때 이미 완벽한 이론으로서의 주체사상을 만주의 카륜회의에서 처음으로 발표했다는 주장은 완전히 거짓임이 명백히 밝혀졌으리라 믿는다.
 
김일성주체사상 비판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먼저 북한 인민을 김일성 왕조에 완전히 복속시켜 그 독재체재를 영구화하려는 획책이요, 다음으로는 김일성주체사상은 남한의 젊은 지식인들과 소외계층을 꼬이기 위해 계획적으로 구축된 것으로서, 이 비판의 프롤로그에서 말한 것처럼 허구의 이론체계였으며 거짓·위장·모호성과 자가당착·기만·억지·개념의 책략 등의 합성물이요 복합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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