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코코(Rocco) 양식의 창시자, 프랑스 예술 문화의 대모 마담 퐁파두르. 부르주아 출신인 그녀가 어떻게 18세기 중반 프랑스 권력의 정점에 오르게 됐을까.
퐁파두르 부인은 아름답고 교양있고 특별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여인이었다. 그녀의 이 같은 마력은 만성 우울증에 시달리던 루이 15세 왕을 수렁에서 건져 냈다. 그녀는 지속적으로 왕의 총애를 받으려면 왕의 감각이 아닌 마음에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다.
이렇게 총명한 그녀였기에 왕의 신임을 20년간 꿰찰 수 있었다. 퐁파두르 부인은 왕의 연인이자 치료사라는 특별한 위치에서 장관을 임명하고 해임하고, 대사에게 조언하고, 장군들과 연락하고, 문화부 장관의 역할을 맡는 등 한 시대를 풍미했다.
퐁파두르 부인의 본명은 잔 앙투아네트 푸아송이다. 1721년에 태어난 그녀는 대기근 당시 프랑스에 식량을 공급하는 일을 맡게 된 아버지가 사기 혐의로 기소되어 프랑스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게 되자 파리 푸아시에 있는 우르술린 수녀원에 맡겨졌다. 어린 푸아송은 여기서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돼 1730년 1월,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다시 데려가야 했다. 이때 푸아송의 대부였던 르 노르망 투르넴이 그녀의 교육을 맡게 됐다. 르 노르망은 18세기 초에 에티올 영지를 획득했고 ‘대녀’ 교육에 많은 투자를 했다. 한때 푸아송 모친의 연인이었던 이 남자는 푸아송의 친아버지일 것이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그는 당대 최고의 교사들을 고용해 어린 푸아송이 완벽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다.
아름답고 쾌활하며 예술과 대화에 재능이 탁월한 푸아송은 주위의 주목을 받으며 자라났다. 투르넴은 아름답게 성장한 푸아송과 결혼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그녀의 친아버지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자 단념했다. 대신 자신의 상속자이자 조카인 샤를-기욤과 스무 살 처녀잔 푸아송을 결혼시켰다. 그리고 이 젊은 부부에게 부르 성이라고도 불리는 에티올 성을 물려주었다. 이 성은 훗날 푸아송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이 성 가까이에 있는 세나르(Sénart) 숲에서 루이 15세 왕을 만나기 때문이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1745년 새해 초 남편은 출장을 떠났고 푸아송은 세나르 숲을 혼자 거닐고 있었다. 이때 사냥을 나온 루이 15세와 마주쳤다. 왕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 이때 국왕은 서른세 살로 매우 잘생겼고 큰 키와 존재감이 인상적이었다. 사랑하던 정부 샤토루 부인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지 얼마 안 된 왕이 우울증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측근들은 왕의 동반자를 찾던 중이기도 했다.
베르니 추기경의 기록에 의하면, 그해 2월15일, 베르사유에서는 왕자와 스페인 공주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유명한 가면무도회가 열렸다. 그날 저녁 왕은 변장한 채 등장했다. 푸아송이 참석했고 왕은 여러 번 그녀 곁을 스쳐갔다. 며칠 후 왕은 이 젊은 여성을 무도회에 초대했다. 그녀의 진주 빛 피부는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고 모든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종종 입술에 혈색을 돋우기 위해 입술을 깨물기도 했다.
그 후 모든 일이 매우 빠르게 진행됐다. 같은 해 4월5일, 그녀는 멋진 모습으로 궁정에 나타나 왕과 함께 식사를 했다. 왕은 4월23일 저녁 식사에 그녀를 다시 초대했다. 불행히도 국왕은 결혼했고 푸아송도 결혼한 상태였다. 어머니와 함께 계략을 꾸민 푸아송은 왕에게 남편이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기 때문에 집에 돌아가는 것이 매우 두렵다고 말하며 베르사유 궁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푸아송은 귀족이 아니기 때문에 궁정에 머물 수 없었다. 왕은 묘책을 찾아야 했다.

푸아송은 왕에게 자신을 퐁파두르 후작으로 명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호화로운 이름은 당시 부르 성에 살던 퐁파두르 후작부인 드 쿠르시용의 성(姓)이었다. 이 후작 부인은 1740년경에 사망했다. 푸아송은 그녀의 성이 섬세하고 발음이 조화를 이룬다고 생각해 자신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싶었던 것이다.
1745년 8월 말, 국왕은 푸아송에게 퐁파두르 후작 작위를 수여했고 그녀는 국왕의 공식 여인이 되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녀가 사회에서 급부상한 이유를 그녀의 연기 재능 때문이라고 말한다. 특히 전통적 가치에 집착하는 왕실에서는 재계 출신 여성의 존재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우로서의 재능은 부인할 수 없는 그녀의 성공의 핵심이었으며, 국왕의 우울함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푸아송의 운명을 바꾼 세나르 숲은 파리에서 남동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예르(Yerres) 계곡과 서쪽으로는 센 계곡이 접한 고원지대에 펼쳐진 이 숲에는 공원이 조성돼 있다. 이 공원은 야외 조각 박물관으로, 숲이 우거진 지역과 개간지 사이에 아름다운 작품들이 전시돼 있어 이를 찾는 방문객은 연간 300만 명이 넘는다.
이 숲의 역사는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에브리(Evry)에 있는 프티-부르 성의 소유주이자 루이 15세의 감독관이었던 앙탱(Antin)공작은 17세기 말 이 숲의 떡갈나무 아래서 사랑하는 여인을 만났다고 전해진다.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앙탱 떡갈나무는 수령이 700세가 넘어 세나르 숲의 최고참이다.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앙탱 떡갈나무는 ‘전망이 아름다운 떡갈나무’로 알려지다가 수십 년 후 원래의 이름으로 되돌아갔다. 19세기 중반에는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가 파리의 생술피스 성당의 예배당을 위해 그린 프레스코화 ‘야곱과 천사의 투쟁’의 영감의 원천으로 활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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