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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양강에 처녀가 있다면 울산에는 큰애기가 있다. 큰애기란 원래 맏며느리를 뜻했지만 점차 젊은 처자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가수 김상희가 ‘울산 큰애기’를 취입할 무렵인 1965년 울산은 초가집이 즐비한 시골이어서 젊은 남자들은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떠나야 했다.
‘울산 큰애기’에는 남편을 기다리며 착실하게 가정을 지키며 살아가는 맏며느리의 예쁜 모습, 남자친구를 기다리는 시골 처녀의 참한 모습이 담겨 있다. 그렇게 삼돌이가 서울로 돈 벌러 떠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울산은 전국을 대표하는 공업도시로 발돋움했다.
산·바다·강 있어야 할 건 다 있다
울산이 공업도시로 성장한 데는 천혜의 지정학적 조건이 큰 기여를 했다. 울산은 동해와 인접해 수심이 깊고 조수간만의 차이가 적어 선박을 대기 용이하다. 대단위 공장지대가 들어서도 끄덕 없을 만큼 광활하고 평탄한 대지도 갖고 있다.
태화강과 회야강을 끼고 있어 공업용수가 풍부하며 대도시인 부산과 대구가 가깝고 동해남부선 철도가 지나 교통도 편리하다.
이에 1962년 2월3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참석한 가운데 남구에서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이 거행됐다. 이후 대한석유공사 울산정유공장·영남화학·한국비료공업·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등이 속속 들어서면서 울산은 명실상부 국내 최대 중화학공업단지로 성장했다.
밝음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 공장 만드느라 대학 유치에 미온적이었던 탓에 이곳은 젊은 층이 즐길 만한 문화가 부족하다. 또한 공업단지에서 흘러나오는 폐수가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울산은 살기 어려운 도시라는 낙인이 찍혔다.
부산과 대구가 가깝다는 이점 역시 상대적으로 무명의 도시라는 설움에 시달리게 했다. 편리한 교통은 주말이면 사람들이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구실이 됐다.
바다로 떠나는 생태여행
유리가 불리로 작용하는 교훈을 통해 울산은 불리를 유리로 바꾸기로 했다. 바다는 세계로 나가는 출구지만 방문객을 불러들이는 창구이기도 하다.
울산시가 야심차게 마련한 ‘EAST 울산 해파랑길 사운드워킹’은 걸으면서 마음의 잡음을 걷어내고 친근한 자연의 소리를 발견하는 프로그램이다. 지향성마이크를 통해 자연의 소리를 모으다 보면 ‘바라보는 풍경’에서 ‘누리는 풍경’으로 주변 환경이 바뀐다.
해파랑길 8코스 사운드워킹은 슬도 등대에서 대왕암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슬슬 걸으며 진행된다. ‘슬도’는 울산 동구 방어진항에 인접한 아주 작은 섬이다. 슬도는 거문고 슬(瑟) 자를 쓴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힐 때 거문고 소리를 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바위가 이런 신비한 소리를 내는 것은 표면을 덮은 타포니(tafoni) 구멍 때문이다. 이 자잘한 구멍은 석공조개(돌맛조개)가 집을 짓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슬도 바위에 난 구멍 수는 120만여 개에 달한다고. 이런 것을 헤아린 사람은 구멍을 뚫은 석공조개보다 더 대단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슬도교 입구에 대형 조형물이 서 있다.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반구대암각화에 새겨진 ‘새끼 업은 귀신고래’다. 새끼 업은 고래는 다산과 풍요를 상징한다. 방어진항 어선이 더 많은 방어와 물고기를 실어 나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고래 조형물을 세운 게 아닐까.
강으로 떠나는 생태여행
도심 한가운데를 관통하며 100리를 흘러가는 태화강은 과거 울산에 오명을 선사한 곳이었으나 2019년 국가정원에 등극하면서 인간승리 아니 도시승리의 상징이 됐다.
태화강의 수질이 가장 나빴을 때가 1996년이다. 생물학적 산소 요구량(BOD)이 농업용수로도 사용할 수 없다는 6등급(11.3ppm)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울산시는 2004년 본격적인 하천 살리기 사업에 들어갔다.
시는 10여 년 동안 9104억 원을 투입해 세 곳의 하수 처리장을 건설하고 4000개의 가정 오수관을 조성했다. 그 결과 현재 BOD가 2ppm 이하의 1등급으로 상승했다. 이에 매년 8000여 마리의 철새 찾아오고 2000여 마리의 연어가 회귀하는 생태환경의 보고가 됐다.
같은 국가정원이라도 모노레일·유람선을 동원한 순천만이 역동적이고 인위적이라면 강줄기를 따라 갈대가 우거지고 까마귀가 나는 태화강은 태초의 자연을 떠올리게 한다.
태화강 십리대숲은 4km(십리)에 걸쳐 심어진 70만 그루의 대나무가 한겨울에도 도시에 초록 숨을 불어넣는 곳이다. 푸른 대숲에 밤이 내리면 오색 반딧불이 조명이 방문객을 환상의 세계로 초대한다. 곳곳에 자리한 포토존은 태화강에서의 추억을 한아름 남길 수 있는 곳.
산으로 떠나는 생태여행
영남알프스 신불산 자락에 자리한 ‘자수정 동굴나라’는 준보석인 자수정을 채광하던 광산이었다. 자수정 광산의 전성기는 1970년대. 언양 자수정은 브라질·잠비아를 제치고 세계 최고 품질로 인정받아 활발한 생산이 이루어졌으나 무분별한 채굴로 씨가 말라 결국 폐광 처리됐다.
동굴은 기후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는다. 추위가 오슬오슬 내린 초겨울에도 이곳 내부는 12~16℃로 기온이 유지된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늘 이 정도인 것을 보면 이 온도가 지구의 체온이 아닌가 싶다.
동굴 길이는 2.5km로 꽤 넓다. 채굴은 끝났지만 자연 상태의 자수정 원석을 볼 수 있고 동굴 속 수로를 따라 보트투어를 진행해 꽤 흥미진진하다. 뜨끈뜨끈하게 몸을 데울 수 있는 기체험방도 있어 어르신들 효도 관광에도 제격이다. 테마파크답게 영남알프스의 경관을 활용한 야외 놀이기구도 여러 기 갖춰져 있다.
흉물로 버려질 뻔한 광산을 동굴공원으로 재생한 것은 높이 살만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동굴 인테리어가 그다지 세련되지 못하다. 에버랜드만큼은 아니더라도 좀 더 수준 있는 꾸밈이 필요해 보인다.
미술관으로 떠나는 생태여행
울산동헌은 조선시대 울산도호부의 수령이 공무를 처리하던 곳이다. 석축처럼 기단을 높인 건물이 동헌의 메인인 반학헌이다. 동헌 안쪽에 자리한 아담한 내아는 도호부사 가족의 살림집이다. 그런데 꼭 있어야 하는 객사(외부 손님 묵고 가는 숙박 시설)가 안 보인다.
동헌 옆으로 울산초등학교가 있었다. 건물이 낡아 2015년 학교를 시립미술관으로 고쳐 짓는 과정에서 땅속에서 객사 유구가 발견됐다. 학생들이 110년 가까이 객사 터를 깔고 앉아 생활했던 것.
문화재 발굴에는 시간이 걸리므로 시는 시립미술관을 그 옆의 옛 중부도서관 터로 옮겨 지었다. 현재 휑한 공터로 남아 있는 곳이 바로 객사 터다. 객사 터 발굴이 끝나는 2027년 이곳은 역사공원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고.
울산시립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팬텀 가든’ 전은 미래를 통해 현재를 바라보는 색다른 생태체험이다. 인지생물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와 프란시스코 바렐라는 “우리는 세계의 공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야를 체험한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폈다.
문경원·전준호 작가는 기후·환경 문제를 다각적으로 관측하고 대안적 미래의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이 전시를 준비했다고 밝혔다.
‘팬텀 가든’은 인류 멸망 후 미지의 새로운 생명체가 방문한 지구에서 과거 인류의 발자취와 환경을 추적하는 가상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이들의 관심은 지구의 최상위 포식자였던 인간이 아닌, 먹이사슬의 생산자 역할을 담당했던 ‘식물’에게로 향한다.
작가는 고도의 지능을 가진 이 생명체가 마치 고고학자처럼 식물의 세계를 조사하고 복원하는 과정을 XR-Lab 공간에서 추상적인 이미지로 풀어낸다. 사면에서 소용돌이치듯 움직이는 기하학적 이미지는 고배율로 확대된 균류의 포자 혹은 우주를 떠도는 성단을 떠올리게 한다.
추상적이고 파편화된 이미지는 물리법칙조차 통합되지 않은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를 하나로 아우르며 타자화된 자연이 아닌 각각의 고유한 서사를 품은 하나의 독립된 세계로서의 생명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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