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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8·15광복 이후 정부 수립, 6·25전쟁과 빛나는 산업화 시기를 거쳐 대한민국은 오늘에 이르렀다. 격동의 한반도, 美CIA 요원으로 그 한복판에서 활약한 마이클 이 박사의 숨 막히는 체험…. 북한 정권의 실체와 광주5·18 등 좌경 친북세력이 주도한 사건들에 관한 증언과 분석,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소용돌이 속 한반도의 미래에 관한 그의 이야기들이 값지다. 이에 美연방정부 공무원으로 살아온 40년 세월을 담은 그의 저서 ‘CIA와 대한민국’을 지면에 연재한다.
압수당한 녹음테이프
나는 박순국 면담을 오후 1시에 시작했다. 거짓말까지 늘어놓으며 그의 입에서 진실한 이야기가 나오도록 유도하느라 신경이 바짝 곤두선 상태였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고 침착하게 그를 대했다. 심문관이 긴장하거나 초조한 기색을 보이면 결국 피심문자에게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고 면담은 실패로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면담을 진행하며 오후 3시 반쯤 되었을 때였다. 중앙정보부 요원 한 사람이 들어오더니 오늘 면담은 여기서 끝내야 한다면서 그를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곧이어 대공 합심반장 성모 중령이 들어와 아주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 선생, 오늘 면담한 녹음테이프와 노트를 내가 압수합니다. 당신은 미국 정부 소속의 심문관이지만 신분은 대한민국 국민이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법에 속해 있고 대한민국 정부의 시책과 기밀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부대에 돌아가서도 오늘 면담한 내용을 절대로 보고하거나 브리핑해서도 안 됩니다. 만일 당신이 이걸 어길 경우 우리 정부가 당신에 대해 엄중한 보안 조치를 취할 겁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이미 각오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순순히 달라는 대로 녹음테이프와 노트를 내놓았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저 사람들이 나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부대에 돌아와 보니 미8군 G-2에서 나온 장교들과 미 502군사정보단 참모들이 나의 귀대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빈손이었다.
어이없어 하는 그들에게 나는 녹음테이프와 면담 노트를 압수당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리고 성모 중령이 협박한 내용도 밝히고 앞으로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미 502군사정보단 단장인 마틴 대령이 “자네의 신변 안전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을 지겠으니 오늘 면담한 내용을 소상히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성모 중령의 이야기가 자꾸 떠올라 불안했지만 내가 박순국에게 접근한 경위며 그가 숨김없이 진술한 내용을 모두 구두로 보고했다. 그리고 그 후 1주일간 집으로 퇴근을 못 하고 영내에서 기거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적군의 전투기가 백주에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대한민국의 포항까지 날아왔는데 우리 군이 그걸 포착하지 못했다는 것, 누가 그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나의 보고를 받은 미군 측에서는 한국 정부의 입장과 정치적 민감성을 고려해 UN군 사령부 참모장 겸 주한 미8군 사령부 참모장인 스미스 중장이 중앙정보부 이후락 부장을 만나기로 했다. 두 사람이 만나 한·미 양국의 입장을 조율하고 모든 사실을 군사기밀로 처리할 것을 합의한 후 박순국을 면담한 미국 측 심문관인 나에 대한 보안 조치를 불문에 부치기로 이후락 부장에게서 직접 약속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1주일 만에 퇴근해 집에 돌아갔다.
그 후 북한에서는 끈질기게 박순국의 송환을 요구해 왔다. 1971년 6월2일에 군사정전위원회 UN측 수석대표 로저스 소장이 판문점에서 국제적십자사의 입회하에 박순국이 거주지 선택의 자유 원칙에 따라, 그리고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강요나 압력 없이 남한에 거주하기로 결정했다고 북측에 통보했다.
1971년 6월10일에는 공군본부에서 내외 귀빈들의 축하를 받으면서 박순국이 대한민국 공군 소령으로 임관되었고 김두만 공군 참모총장이 그에게 계급장을 달아 주었다. 그 자리에서 박순국은 답례사로 반공투사로서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뒤늦게나마 역사의 진실을 깨달은 박순국은 최선을 다해 군에 복무하며 한·미 양국 정보기관에 지대한 협조를 제공했다.
이후 그는 결혼해서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고 슬하에 두 딸을 두었다. 그리고 공군 대령이 되기까지 공군본부에서 근무하다가 1976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중앙정보부의 러브콜
나는 미 502군사정보단에 근무하면서 상부기관으로부터 20여 개의 표창장과 감사장을 받았다. 특히 주한 미8군 사령부 정보참모부(G-2)로부터 받은 표창장들은 내 생애의 소중한 기록으로 남게 될 것이다.
나의 역할은 심문관의 위치에서 발전하여 차츰 대외 활동의 분량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한국 정부, 즉 국방부·정보사령부·보안사령부·중앙정보부·치안국과 국회 등에서 요인들이 내방하면 내가 저들을 일차적으로 접견하고 부대장을 만나게 한 다음, 부대 수용소의 현황과 북한의 대남공작 실태와 인민군의 전투 서열에 대해 브리핑을 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또한 부대장이 한국 정부기관을 방문할 때는 내가 꼭 통역관으로 동행했다.
그 밖에도 나는 대외기관과 업무 연락을 하는 연락관의 역할을 했으며 특히 해마다 한 번씩 열리는 한미합동 전투서열회의 (Order of Battle Conference)에 통역관으로 불려갔다. 나는 그 일을 12년간이나 했다.이회의는 미8군 G-2가 주관했고 미국 국방정보국(DIA)의 북한 담당 전문가들과 주한미군 육·해·공군의 북한 담당 전투서열 정보장교들, 대한민국의 국방부 산하 모든 북한 담당 정보장교들이 참석해 새로운 정보를 교환하고 평가하며 의견 차이를 조율하는 아주 중요한 회의였다.
또한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와 미국 CIA의 북한 담당 전문가들이 1년에 한 번씩 모이는 정보교환회의(Intelligence Exchange Conference)에도 통역관으로 여러 번 불려갔다. 이 회의에서는 북한의 정치·경제·군사전략·외교 안보·체제 취약점 등이 주요 어젠다로 논의되었다. 그때가 어느 해였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강인덕 씨가 중앙정보부 제8국 (북한담당) 국장일 때 내게 중앙정보부로 옮겨 와서 일해 볼 생각은 없느냐고 의중을 물은 일도 있었다. 그분은 나중에 통일부 장관을 역임했다.
솔로몬의 재판
1971년 5월1일에 나는 GS-11급에서 GS-12급으로 진급을 했다. GS-12급은 미군 현역 소령과 대등한 계급이다. 그 당시 나의 직속상관인 중대장도 육군 소령이었다. 10여 명 CMS 동료직원의 절반 이상이 나의 선배들이었는데 그들보다 앞서서 내가 먼저 12급으로 진급한 것이다. 이후 동료들이 나를 좀 심하게 야유하고 괴롭혀 부대장에게 나의 진급을 취소해 달라고 했다.
하루는 아침에 출근해 보니 미 502군사정보단 본부에서 단장인 윌리엄 베네딕트 대령이 와 있었고, 중대장 토머스 미들턴 소령이 전 부대원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모두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하였다. 회의가 시작되면서 중대장이 입을 열었다.
“마이클이 진급한 것은 그의 능력과 성실성, 그리고 역할 때문이다. 현재 우리 부대에 재직하고 있는 CMS들 중에서 마이클과 견줄 만한 능력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와 보라. 그리고 미군 장교 사병들 중에서도 진급을 추천하고 싶은 CMS가 있으면 추천하라. 여러분이 동의하면 내가 그를 즉시 진급시켜 주겠다.”
장내는 물을 뿌린 것같이 조용하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약 1분이 지났다. 중대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도 없나. 그러면 됐다. 오늘의 회의는 이것으로 끝낸다. 모두 해산, 각자 사무실로 돌아가라.”
그리고 자리를 떴다. 중대장이 기지에 넘치는 솔로몬식 재판을 한 것이다. 그러나 저들이 더 이상 나의 진급에 대해 왈가왈부하지는 못했지만 마음속에 품고 있는 시기심까지 잠재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모른 척하고 열심히 근무를 계속했다.
프로필
△ 美 연방정부 40년 근속
(DIA(Defense Intelligence Agency·국방정보국) 16년·CIA(중앙정보국) 24년)
△ 1976년 미국 외무고시 합격
△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정치학 박사
△ 美 국무성 동아시아 문제 수석연구원
△ 美 국무성 외교연수원 교수
△ 주한 미국대사관 정무관
△ CIA 한·미 안보협력 조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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