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쓰는 역사 [10] 나라가 망해도 꽃은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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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간섭기 혼란 속에 배꽃 만난 이조년

스카이데일리 기자페이지 + 입력 2024-05-06 09:05:47

▲ 배꽃은 열매가 커서인지 과실나무 가운데 꽃의 크기도 비교적 크고 색깔도 배 속같이 하얗다. 윤상구 사진작가

해마다 봄이 되면 매화·복사꽃·벚꽃·배꽃·살구꽃·자두꽃 등 과실나무 꽃들이 흰색으로, 분홍색으로 앞다투어 천지를 뒤덮다가 꽃비가 되어 사라진다. 이들 과실나무는 꽃도 황홀하게 아름답지만 여름이면 달디단 열매까지 풍성하게 내어준다. 이래저래 인간에게 ‘단맛’을 만끽하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들이다.

과실나무 꽃들은 모습이 거의 비슷해서 섞여 있으면 한눈에 구별하기 쉽지 않다. 물론 자세히 들여다보면 꽃잎의 모양이나 꽃잎 끝의 갈라짐, 꽃의 배열 등이 다 다르다. 그중 배꽃은 열매가 커서인지 비교적 꽃의 크기가 크고 색깔은 배 속같이 유난히 하얗다.

봄밤의 애잔한 정취를 짙게 풍기는 배꽃

낮 동안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던 꽃들도 해가 지면 그 빛을 잃게 마련이다. 하지만 밤이 되어도 하얗고 탐스러운 배꽃은 어둠을 배경으로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그렇게 봄밤의 애잔한 정취를 짙게 풍기는 배꽃(이화, 梨花)을 노래한 유명한 시조가 있다.

이화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寒)이 삼경(三更)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다정가’라 불리는 이 시조는 고려말의 문관 이조년(1269~1343)의 작품이다. 교과서에 실려 있어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지만 그 작가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이조년이 살았던 시대를 역사에서는 ‘원 간섭기’라 부른다. 원 간섭기는 1259년부터 1356년까지 100년 가까이 계속되었는데 그때 고려왕의 시호에는 충성 충(忠)자를 붙였다. 원나라에 충성을 바친다는 의미였다.

또 왕자가 태어나면 어릴 적에 원나라로 보내서 원나라식 생활을 익히게 하며 원나라 선생에게 원나라 글을 배우고 원나라 친구들을 사귀며 자라게 했다. 어른이 되면 원나라 공주와 결혼시켜 고려로 내보내 왕위를 잇게 했다. 고려 왕은 원나라 공주와 결혼해야만 비로소 막강한 세력을 갖출 수 있었다. 게다가 원나라 공주에게서 태어난 왕자가 다음 왕위를 잇곤 했으니 고려 왕이지만 순수한 고려인의 혈통이라 할 수 없다.

충렬왕이 즉위한 1274년부터 충혜왕이 쫓겨난 1344년까지 그 70년 동안 고려 왕을 지낸 사람은 네 명이다. 하지만 그 재위 시기는 여덟 차례나 된다. 왕마다 즉위했다 쫓겨나고 복위하기를 되풀이했기 때문이다. 원나라는 고려 왕의 자리를 이렇게 장난감 굴리듯 했다. 이런 상황만 봐도 고려는 그때 이미 국운이 다했다고 할 수 있다.

고려 왕보다 더 큰 권력 ‘원나라 공주의 남편’

충렬왕은 원나라 첫 황제 쿠빌라이의 사위였다. 충렬왕비만 황제의 딸이었고 이후 고려 왕에게 시집온 공주들은 원나라 왕들의 딸이었다. 충렬왕은 변발에 몽골식 옷을 입고 신하들에게도 몽골 복식을 강요했다. 그런데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왕비가 죽자 충렬왕은 권력을 잃고 쿠빌라이의 외손자이며 또 다른 원나라 공주의 남편인 아들 충선왕에게 왕위를 넘겨야 했다.

충선왕도 5개월 만에 왕위에서 쫓겨났다. 충선왕이 고려 여자를 가까이 하자 충선왕비가 원나라 조정에 이를 고자질했기 때문이다. 충렬왕이 복위하고 충선왕은 원나라로 갔다. 충렬왕은 복위 후에도 연회와 사냥으로 세월을 보냈다. 고려 조정 대신들은 충렬왕 편과 충선왕 편으로 나뉘어 서로를 트집 잡아 원나라에 고자질하는 데 에너지를 허비했다.

충선왕의 아들 충숙왕도 나랏일을 뒷전에 두기는 마찬가지였다. 충숙왕의 뒤를 이은 충혜왕은 즉위 직후부터 향락과 여색에 젖어 지냈다. 성격도 포악해서 실정이 거듭되니 원나라에서는 그를 베이징으로 소환하고 부왕인 충숙왕을 복위시켰다. 그런데 충숙왕이 죽자 다시 충혜왕을 왕좌에 앉혔다.

충혜왕에게 간언하다 쫓겨난 이조년

▲ 우국충정으로 잠 못 이루던 이조년에게 배꽃은 유난히 처연하고 애잔해 보였을 것이다. 윤상구 사진작가

한번 쫓겨났다가 돌아왔지만 충혜왕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주색과 사냥을 일삼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며 방탕한 습성을 끝내 버리지 못했다. 이 무렵 예문관 대제학으로 제수되었던 이조년은 충혜왕의 음탕한 생활을 말리려 간언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샀다. 그는 간신히 죽음을 면했지만 벼슬에서 쫓겨났다.

결국 친원파 대신들이 충혜왕의 실정과 횡포를 원나라에 알려서 충혜왕은 귀양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원나라의 귀양지에 닿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 충혜왕의 나이는 30세였다. 이조년은 고향에서 맞은 말년의 어느 봄날, 시조 ‘다정가’를 지었다.

나라가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없는 시대에 살았던 이조년. 만물이 소생하는 봄밤에도 우국충정으로 잠 못 이루던 이조년에게 배꽃은 유난히 처연하고 애잔하게 보였을 것이다. 나라가 기울어도 인간 세상에 커다란 비극이 닥쳐도 꽃은 계절을 지켜 어김없이 피어난다. 때로는 아름다운 꽃이 슬퍼 보이고 꽃이 만발한 계절이 잔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이런 섭리 때문이리라.

[글 황인희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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