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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은 가야를 대표하는 뛰어난 악사였다. 가야연맹에 속한 사이기국 사람으로 어릴 때부터 음률에 두각을 나타내 당시 맹주국인 대가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악기와 노래·춤 등 음률과 관계된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기량을 뽐냈다. 그중에서도 특히 금(琴)을 다루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그의 손가락이 현(絃)을 타고 오르내리면 새들조차 지저귀기를 멈추고 귀를 기울일 정도였다. 우륵의 명성은 하루가 다르게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대가야의 가실왕은 음률과 풍류를 좋아하는 임금이었다. 그는 악기와 악공을 모으는 데 거금을 아끼지 않았다. 가야 전역의 실력 있는 장인을 소집하여 악기를 만들고, 이를 연주할 악공을 양성했다.
가야금은 가실왕의 명으로 만들어진 악기 중 대표작이었다. 삼한 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던 금을 변형시킨 것으로, 기존의 5줄에서 12줄로 현 수를 늘려 오묘하고 세밀한 선율을 자아낼 수 있었다.
가실왕은 가야금에 걸맞은 곡을 만들기 위해 금을 다루는 데 당대 최고라는 우륵을 초빙했다. 우륵은 이를 영광으로 여기고 가야금 곡을 만드는 일에 온 힘을 다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12곡의 탄주곡이 탄생했다.
우륵은 작곡을 하면서 가야의 정신을 일깨울 수 있는 고유의 리듬을 찾으려 애썼다. 그래서 가야 각 지방의 특색을 담은 음악이 태어났다. 첫째는 하가라도, 둘째는 상가라도, 셋째는 보기, 넷째는 달이, 다섯째는 사물, 여섯째는 물혜, 일곱째는 하기물, 여덟째는 사자기, 아홉째는 거열, 열째는 사팔혜, 열한째는 이사, 열두째는 상기물이었다. 이 곡들 가운데 금환(金丸)처럼 여러 개의 공을 굴리는 기예를 펼칠 때 연주하는 보기와 신라의 산예(狻猊)처럼 사자탈을 쓰고 놀 때 쓰는 사자기(獅子伎)를 제외하고는 모두 가야 제국의 고유한 가락을 내포하고 있었다.
가실왕은 우륵의 성과를 흡족해 하며 나라 안에서 벌어지는 행사 때마다 그의 곡을 연주하도록 했다. 그런데 우륵의 염원과는 달리 대가야는 갈수록 쇠락의 길을 걸었다. 지난날 안라국이 백제에 반기를 들고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면서 결국 가야연맹의 분열을 초래한 것이다. 그러다가 이제는 신라와 백제에 복속해야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됐다.
즉위 초에는 가야의 부흥에 힘을 쏟았던 가실왕 역시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자포자기해서 풍류에만 빠져 지냈다.
그러던 차에 대가야의 대신 설추(薛追)가 우륵이 국왕을 요악(妖惡)으로 현혹해서 정사를 팽개치고 풍류에 빠지게 했다고 탄핵했다. 그는 평소 우륵이 가실왕에게 총애를 받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주변의 기류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우륵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제자인 이문을 불렀다.
“아무래도 이곳에 계속 머물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 같구나. 내 한목숨 사라지는 거야 별일이 아니지만 가야의 혼이 담긴 음악이 사라지는 건 볼 수가 없구나. 오늘 밤 이곳을 떠나야겠다. 너는 어쩌겠느냐? 나를 따르면 고생만 하게 될 테니 살길을 찾아 가거라.”
이문은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제가 스승님을 떠나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지옥 끝이라도 따라가겠습니다.”
이문에게 우륵은 특별한 존재였다. 부모 얼굴도 모르는 채 도성에서 구걸하며 살아가던 그를 거두어 이때까지 친자식처럼 보살피고 기예까지 전수해 준 은인이었다.
이문은 가야금을 등에 메고 우륵을 따라나섰다. 며칠을 걸은 두 사람은 가야의 경계를 벗어나 신라 땅으로 들어섰다. 처음에는 고향인 사이기국으로 가려 했으나 그곳 역시 대가야의 손길이 미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택한 곳이 대가야와 불편한 관계에 있는 신라였다.
우륵은 가을 산의 낙엽을 밟으며 하염없이 걷기만 했다. 낙엽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적막한 산중에 길고도 아프게 울려 퍼졌다. 이문이 메고 있던 가야금이 덩달아 흔들리며 애잔한 울림으로 화답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그들이 당도한 곳이 바로 국원이었다.
우륵은 한참 산세를 살피다가 제자를 돌아봤다.
“저 아래 계곡이 산의 정기(精氣)를 담고 있구나. 저기에 머물도록 하자.”
이때부터 두 사람은 계곡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살게 됐다.
우륵은 낮에는 산속을 돌아다니며 약초를 캐거나 덫을 놓아 짐승을 잡았다. 밤에는 흐르는 물소리와 새소리·바람 소리 등 자연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가야금으로 표현했다.
이문은 약초를 산 아랫마을에 내다 팔아 곡식을 마련하거나 나무를 해서 땔감을 마련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가야금을 익혔다.
스승의 연주를 듣고 있노라면 이문은 고향 마을의 솔밭 속에서 뒹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했다. 그의 연주에는 가야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이들이 계곡의 오두막에서 머문 지도 어언 1년이 넘어 또다시 겨울이 지나갔다. 수북이 쌓여 있던 눈이 녹자 이문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마을로 내려갔다. 그는 겨우내 마련한 모피를 장사치에게 넘기고 돌아오다가 심상치 않은 광경을 목격했다.
저자의 저편에서 사람들이 술렁거리더니 한 떼의 기마병이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왔다. 이들은 마을 사람들이 모인 저자 가운데 멈춰 섰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무사가 큰소리로 외쳤다.
“고구려와 큰 싸움이 있을 것이다. 주변에 사는 백성은 모두 성으로 들어가 피신토록 하라!”
백성의 입에서 한탄이 튀어나왔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또 시작이군!”
“얼른 짐을 꾸리세. 이대로 있다가는 뼈도 못 추릴 걸세.”
사람들은 너나없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이문이 마을에 내려가서 들은 바로는 그들이 머무는 곳은 상당산(上黨山)의 낭자곡(娘子谷)이라는 곳이었다. 근처에는 낭비성(娘臂城)이 있고 주위로 여러 마을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예부터 요충지로 삼국이 모두 군침을 흘렸기 때문에 수시로 주인이 바뀌었다. 하지만 백성으로서는 탐관오리가 아니라면 누가 주인이 되든 상관없었다.
이문도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여기고 부랴부랴 낭자곡으로 달려갔다. 돌아가는 길에 신라 군사들이 바삐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이처럼 부산하게 움직이는 걸 봐서는 전쟁이 임박한 것이었다.
전쟁 소식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비릿한 봄바람이 불었다. 곧 비정한 검무(劍舞)가 너울거리고 사방에 혈화(血花)가 만개할 것이었다.
한편, 진흥왕의 명을 받은 거칠부는 군사를 이끌고 죽령을 지나 한수 상류로 나아가고 있었다. 낭비성에 피신한 백성은 고구려가 대규모 군사로 반격해 오리라 예상했다. 그렇게 되면 낭비성도 무사할 수 없었다.
진흥왕은 고구려군의 반격에 대비하는 한편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친히 낭비성으로 왔다. 그런데 거칠부가 한수 유역까지 나아가 십여 개의 성을 함락시키는 동안에도 고구려군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북방에서 돌궐(突厥) 군사들이 고구려로 쳐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돌궐은 철륵(鐵勒)의 한 부족이었다. 철륵의 분파인 아사나(阿史那)의 족장 토문(土門)이 주변 부족들을 흡수하고 급속히 성장한 것이다. 북방 초원의 강자인 유연을 물리친 후 계속 세력을 확장한 돌궐은 계속 남하해 북제(北齊)를 압박했다.
토문은 북제의 배후에 있는 고구려가 두려웠다. 그래서 사신을 보내 함께 북제를 공격해 영토를 나누자고 제안했다.
고구려 양원왕은 그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해 온 북제와의 의리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돌궐의 사신에게 거절의 뜻을 전하고 섣불리 군사를 움직이지 말라 엄중히 경고했다.
사신으로부터 양원왕의 뜻을 들은 토문은 고구려를 먼저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장군 묵고(默古)에게 군사 3만을 주어 고구려의 신성을 치게 했다.
고구려 서북변의 요충지인 신성의 방비는 굳건했다. 묵고가 이끄는 돌궐군은 초원에서의 전투는 능해도 공성전에는 익숙지 않았다. 그들은 기세 좋게 신성을 공격했지만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물러나야 했다. 묵고는 할 수 없이 군사를 돌려 백암성으로 내려갔다.
양원왕은 돌궐이 쳐들어왔다는 급보를 받고 장군 고흘(高紇)에게 1만의 군사를 주어 막도록 했다. 고흘이 이끄는 철기군은 바람같이 요동으로 달려갔다.
고구려군은 거침없이 돌궐의 진영을 휘젓고 다니며 적들을 쓸어 버렸다. 마치 해일이 해안의 바위를 순식간에 삼켜 버리는 것 같았다. 여기서 살아 돌아간 돌궐 군사가 열에 하나도 되지 않았다.
이 무렵, 낭비성에 머물고 있던 진흥왕은 성 안으로 피신해 온 우륵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행궁인 하림궁(河臨宮)으로 돌아간 밀봉은 국왕에게 우륵을 만났던 얘기를 하고, 그의 뜻을 전했다. 진흥왕은 시위의 말을 듣고 그에게 더욱 관심을 두게 됐다.
며칠 후 우륵은 약속대로 행궁을 찾아왔다.
진흥왕은 우륵이 도착했다는 전갈을 듣고 그를 들이게 했다.
왕은 시립해 있던 이사부에게 얘기했다.
“며칠 전에 우연히 그의 음률을 듣고 마음에 파문(波紋)이 일어났소. 어떤 인물일지 궁금하구려.”
이사부도 호기심이 생겨서 주인공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잠시 후, 시위의 뒤를 따라 우륵과 가야금을 멘 이문이 들어왔다.
두 사람은 국왕에게 예를 올렸다. 왕이 우륵을 천천히 살펴보니 청아하면서도 기품이 있었다. 속된 구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진흥왕은 마음이 크게 흡족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아직도 그 가락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구나. 짐이 들으니 가야 사람이라고 하더구나. 멀리 이곳까지 와서 만나게 되다니, 이는 틀림없이 하늘이 점지한 인연일 것이다.”
“소인은 한낱 악공(樂工)에 불과합니다. 이리 과분하게 환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진흥왕은 우륵의 겸손한 태도에 마음이 끌렸다.
“그대의 악곡을 제대로 듣고 싶다. 짐을 위해 가야금을 연주해 줄 수 있겠는가?”
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종들이 대전에 연주할 자리를 마련했다.
그러자 우륵이 이문을 가리키며 공손히 말했다.
“저의 제자도 솜씨가 탁월합니다. 먼저 들어 보시지요.”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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