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의 이른바 ‘극우’ 정당 국민연합(RN) 소속 마린 르펜(56) 의원에게 법원이 31일(현지시간) 유럽연합(EU)자금 유용 ‘유죄’를 판결했다. ‘피선거권 박탈형’이었으며, 심지어 1심 단계임에도 이례적으로 검찰 측 요청을 발아들여 ‘즉시 형 발효’가 이뤄졌다. 선고 당일 밤 TF1 채널에 출연한 르펜은 자신의 2027년 대선 출마를 막기 위한 정치적 결정이라며 결백을 주장했다.
파리 형사법원은 르펜을 비롯한 RN 관계자들이 2004∼2016년 유럽의회 활동을 위해 보좌진을 채용한 것처럼 허위 서류를 꾸며 보조금을 받아낸 뒤 실제 당에서 일한 보좌진 급여 지급 등에 쓴 혐의(공금 횡령·사기 공모)를 인정했다. 이에 따라 르펜에게 징역 4년(전자팔찌 착용 상태로 2년간 가택구금 실형)에 벌금 10만 유로(약 1억5000만 원), 5년간 피선거권 박탈이 선고됐다. 2027년 4∼5월 실시될 차기 대선 이전에 피선거권 박탈 효력을 중지시키지 못하면 르펜의 대선 출마가 불가능해진다.
르펜은 1심 단계의 ‘피선거권 즉시 박탈’에 대해 “법치주의에 반한 처사”라며 “대선 출마 당선을 막기 위해서다. 이게 정치적 결정 아니면 뭐냐”고 목소리 높였다. 또 “재판관들이 처음부터 내 설명을 다 무시한 것 같다. 편향된 방식으로 판단을 받게 되리라 감지는 했지만 민주적 절차를 이렇게까지 위반한 채 유권자 선택에 간섭할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며 “가능한 한 빨리 항소할 것”을 선언했다.
아울러 르펜은 “수백만 프랑스인이 분노하고 있다. 인권의 나라에서 판사들이 독재 정권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관행을 자행했다는 사실에 상상 못할 만큼 화났다. 오늘 재판관이 대선 승리가 예상되는 후보를 수백만 프랑스 국민에게서 빼앗았다”며 “민주주의와 이 나라에 암울한 날”이라고 덧붙였다.
르펜은 자신의 대선 출마 좌절시 RN의 대안으로 조르당 바르델라(29) 당 대표가 거론되는 점에 대해 “당의 엄청난 자산이다. 그런 바르델라를 필요 이상 빨리 사용하지 않길 바란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난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대선에 출마할 수 있도록 항소심 판결이 내려지길 간절히 바란다”며 “30년간 불의에 맞서 싸워 왔듯 앞으로도 끝까지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자국 중심주의를 내세운 RN 지지도가 상승일로인 가운데 일각에선 르펜을 대신해 바르델라가 대권을 거머쥔 다음 르펜이 임명직 총리를 수행하게 될 시나리오까지 거론되지만 르펜은 사실상 거부 의사를 밝혔다. “민주주의를 그렇게 쉽게 부정하는 것에 굴복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 그런 상황에 익숙해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정계 은퇴 가능성 역시 일축했다. 르펜은 “민주주의에선 유권자들이 결정권자다. 난 이 말을 전하러 왔다”며 지지자들을 향해 “걱정 마시라. 낙담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강력한 대권 주자인 르펜의 낙마 가능성에 국내외 정치권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시각은 좌우가 극명하게 갈린다. 녹색당의 마린 통들리에 대표는 AFP통신에 “의회에서 피선거권 박탈법 투표 당시 르펜이 반대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르펜도 법의 적용을 받는다”고 짚었다. 사회당은 성명으로 “모든 사람에게 사법부의 독립성과 법치주의 존중을 촉구”했으며,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소속된 집권 르네상스당의 프리스카 테베노 의원도 “법을 존중하는 게 모두의 몫이다. 특히 정치인이면 더 그렇다”고 말했다.
반면 우파 진영에선 사법부의 정치 개입을 우려한다. 공화당의 로랑 와퀴에즈 하원 원내대표는 “민주주의국가에서 (의원으로) 선출된 국민의 대표가 선거 출마를 금지당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며 “정치적 논쟁은 투표함에서 결정돼야 한다”고 AFP에 견해를 전했다. 또 다른 우파 정치인이자, 수십년 좌파가 나라를 어떻게 망쳤나를 정리한 ‘프랑스의 자살’ 저자 에리크 제무르(르콩케트 대표)도 “누구에게 투표할지 판사가 결정할 일이 아니다”라고 엑스에 적었다. 르피가로 또한 이날 재판부가 피선거권 박탈을 선고하며 ‘가(仮)집행’을 명령한 것은 “정치인의 미래를 마비시키는 사법적 수단” “무죄 추정 원칙의 훼손”이라고 꼬집었다.
유럽 내 우파 정부들도 ‘정치의 사법화’라며 비판에 가세했다. 마테오 살비니 이탈리아 부총리가 성명에서 “유권자의 판단이 두려운 사람들은 법원 판결에 안심하곤 한다”고 풍자했으며, 러시아의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에서 “갈수록 여러 유럽국이 민주주의 규범을 위반하는 길을 간다”고 지적했다.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의 경우 엑스에 “내가 마린(르펜)이다”라는 메시지를 띄웠다.
미국에선 더 노골적인 반응이 나왔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엑스에 “민주적 투표를 통해 승리할 수 없을 땐 법·제도를 악용해 상대방을 감옥에 가두는 것, 이게 전 세계 급진좌파들의 표준 각본”이라고 적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집무실에서 르펜 판결 관련 질문을 받자 “유죄 받을 일 없을 것으로 사람들이 생각했는데 매우 큰일”이라며 그녀를 “유력 후보”로 언급하더니 “이 나라(미국) 같은 일”이라고 논평했다. 지난 대선 때 자신에게 4차례 형사 기소가 강행된 것을 빗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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