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쓰는 역사 [45]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사랑받은 라벤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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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벤더는 향 좋고 약효도 뛰어난 귀한 식물

스카이데일리 기자페이지 + 입력 2025-01-13 15:04:02

▲ 라벤더는 기다란 꽃대 위에 작은 타원형 보라색 꽃망울이 여러 개 매달려 피어난다. 윤상구 사진작가

라벤더 재배와 활용의 역사는 아주 길다. 고대 이집트 무덤의 관 속에서 라벤더꽃이 발견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최소한 2500여 년 전부터 인도와 중동 지방에서 재배되어 차츰 전 세계로 퍼져나간 것 같다.

라벤더는 향 좋고 약효도 뛰어나서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다. 고대 로마에서는 입욕제로 쓰였고 말린 꽃은 향이 퍼지도록 서랍이나 벽장 등에 넣어두기도 했다. 라벤더 향을 맡거나 그 차를 마시면 불면증 치료나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효능 덕분에 심장을 건강하게 할 수 있고 천연 방부제나 곤충 퇴치제 역할도 했다. 상처 소독·염증 치료·벌레 물린 데·화상 응급 처치 약으로도 효과가 있어 서양 가정에서는 상비약으로 두기도 했다.

페스트 퇴치약으로 쓰였던 ‘4인의 도둑 식초’

로마 시대에 라벤더 한 단 가격이 병사 한 달 월급에 맞먹을 정도였다니 얼마나 귀한 허브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귀한 라벤더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 호사가들의 사랑을 받았고 유럽의 귀족들은 꽃을 갈아 비스킷으로 만들어 먹기도 했다고 한다. 라벤더와 로즈마리 등을 섞어 만든 식초는 ‘4인의 도둑 식초’라는 별명으로 불리는데 여기 재미있는 일화가 전한다.

1630년경 남유럽에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 페스트로 죽은 사람들의 물건을 훔치는 도둑 네 명이 있었다. 관청에 붙들려온 이들에게 페스트에 전염되지 않는 비결을 묻자 라벤더 등으로 만든 허브 식초를 몸에 발랐다고 했다. 이 소문이 돌면서 ‘4인의 도둑 식초’라는 별명을 얻었고 페스트 퇴치약으로 한동안 인기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영국으로 전해진 라벤더는 왕실 정원수로 재배되었고 엘리자베스 1세에게 사랑받는 식물이 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라벤더 차와 향수로 편두통을 치료했고 라벤더 과자를 디저트로 즐겨 먹었다고 한다. 또 자신의 식탁에 라벤더 잼을 반드시 올려놓으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라벤더는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향수 재료였고 지금 시판되는 향수 브랜드 중에는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이 포함된 제품도 있다.

라벤더는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향수 재료

▲ 라벤더는 향 좋고 약효도 뛰어나서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다. 윤상구 사진작가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 성공회를 만든 헨리 8세의 둘째 딸이다. 그 어머니는 헨리 8세와 교황과의 갈등을 불러온, ‘1000일의 앤’ 앤 불린 왕비다. 엘리자베스가 즉위할 당시 잉글랜드는 종교 문제로 정국이 불안했다. 아버지 헨리 8세가 세운 성공회와 가톨릭·개신교 사이의 긴장 관계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친척 언니였던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 측도 엘리자베스 1세에게 위협 세력이었다.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 왕가가 외가인 메리 스튜어트는 앤 불린이 헨리 8세의 첩이며 그 사이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는 사생아라고 주장했다. 결국 메리 스튜어트가 진정한 잉글랜드의 여왕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1세는 여장부 같은 기질로 자신에게 닥친 위협을 모두 해결해 나갔다. 일단 그녀는 외모로도 주변을 압도했다고 한다. 남성들의 평균 신장이 170cm도 안 되던 당시 그녀의 키는 175cm였다. 현재 남아 있는 초상화를 보면 붉은빛 도는 금발과 매부리코는 아버지를 닮았고 검은 눈과 가무잡잡한 피부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듯하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아버지 쪽을 더 많이 닮아 신하들로 하여금 강력한 군주 헨리 8세를 연상하게 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에스파냐와의 전쟁 포고문에 “나의 몸은 여인의 것이나 나의 심장은 잉글랜드 국왕의 것이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했다. 또 누군가 여자라고 무시하는 듯하면 엘리자베스 1세는 “내가 남자였다면 그런 말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불같이 화냈다. 그녀가 화내는 모습을 본 사람들의 입에서는 ‘역시 헨리 8세의 딸’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고 한다.

작은 하나들이 어우러져 장관 이룬 라벤더밭

그녀는 강한 군주였고 결단력 있는 여왕이었다. 해적이었던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등용하여 에스파냐제국의 무적함대를 완전히 격파한 덕분에 영국은 바다를 통해 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고 이로써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또 ‘엘리자베스 시대’는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철학가 프랜시스 베이컨 등이 활약한 문화의 번영기이기도 했다.

라벤더는 기다란 꽃대 위에 작은 타원형 보라색 꽃망울이 여러 개 매달려 피어난다. 마치 곡식의 이삭과 같은 모양이다. 그래서 한 송이 한 송이 떼어서 보면 꽃 모양이 조금은 허전하고 초라하다. 그러나 이 꽃들이 한 데 어울려 피어 있는 라벤더밭은 보랏빛 카펫을 깔아놓은 듯 장관을 이룬다.

엘리자베스 1세가 대영제국의 근간을 마련했다고 하지만 당연히 그녀 혼자만의 공은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라벤더밭처럼 작은 하나들의 어우러짐이다. 영국 국민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처음 정착한 땅에 처녀 여왕(Virgin Queen) 엘리자베스를 기리며 ‘버지니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정도로 여왕을 사랑하고 존경했다. 여왕의 성공에는 국민의 믿음과 존중이 가장 큰 밑거름이 되었을 듯하다.

[글 황인희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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