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79] 삶은 선물처럼 기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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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두 번째 선택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4-26 06:30:10

-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린 순간 가장 먼저 외국이구나, 자각한 것은 후각이었습니다. 내가 인식하지 못하던 내 나라의 냄새가 아닌 생소하고 이국적인 공기의 맛. 낯선 나라에는 낯선 냄새 입자들이 공기 중에 떠다니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똑같진 않더라도 서점과 책에서 나는 냄새만큼은 내가 타국의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잠깐이나마 내려놓게 해 주었습니다.

나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매대 앞에 서서 책 냄새를 맡았습니다. 저자의 사진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책을 펼치고 문장들을 손끝으로 만지며 활자의 감촉을 느껴 보기도 했습니다. 마음을 끄는 단어나 문장이 있으면 조용히 발음해 보거나 사전에서 단어를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손님들로 북적이지는 않았지만 텅 비어 있던 적은 드물었습니다. 주인은 카운터에 앉아 책을 읽다가 손님이 원하면 책을 찾아 주기도 하고, 값을 계산하고 다시 자신의 책을 펼쳤습니다. 나는 한 시간쯤 서점을 서성이며 다양한 책들을 열고 쓰다듬고 냄새 맡았습니다. 책을 덮어 두고 나올 때는 고맙다고 고개 숙여 인사했습니다. 주인은 다음에 또 오라고 인사했습니다.

서점에 다니기 시작한 지 열흘쯤 되었을 때입니다. 처음엔 눈에 들어오지 않던 제목과 작가 이름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마침내 한 권의 책을 발견했습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작가의 얼굴이었습니다. 헤르, 만. 헤세, 운, 템, 라트. 더듬더듬 이름과 제목을 읽었습니다. 가방에서 사전을 꺼내 단어를 찾았습니다.

‘수레바퀴 밑에서’였습니다. 그 옆에는 데, 미, 안? ‘에밀 싱클레어의 젊은 날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데미안’이 있었습니다.

아! 그동안 왜 헤세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나는 너무 반가워서 책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습니다. 나는 책을 가슴에 끌어안고 처음으로 미하엘에게 뛰어갔습니다. 책을 들고 나타난 나를 바라보는 미하엘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읽을 수 있느냐고 그가 물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한국에서 번역본을 읽은 적 있다고 더듬더듬 말했습니다. 미하엘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습니다.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그 사람의 책이라는 게 있습니다. 삶을 바꾸어 놓는 책 말입니다. 어떤 이는 운명이라고도 하지요. 이 책이 당신에게는 그런 것 같습니다.”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나는 그의 푸른 눈동자를 집중해서 바라보았습니다.

“운명은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삶은 선물처럼 기쁜 것이니까요.”

나는 그의 말을 헤아렸습니다. 삶이 선물이라니. 삶이 기쁨이라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었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삶은 내게서 모든 걸 빼앗아 갔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운명이 내게 준 대로 살았습니다. 나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독일로 오게 된 것은 내 인생에서 첫 번째 나의 선택이었습니다. 힘들지만 나는 지금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스스로 선택하겠습니다. 이 책이 나의 두 번째 선택입니다.”

주어도 동사도 맞지 않는 문장이었지만 나는 내 뜻을 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미하엘은 나를 이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지갑에서 돈을 세어 그에게 내밀었습니다. 책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서점을 나와 기숙사를 향해 숨이 차게 뛰었습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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