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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다시 어지러웠다. 대학가에선 연일 ‘군부독재 타도’의 구호가 끊이지 않았다. 87년 새해에 들려온 소식은 처참했다. 박종철이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이 보도된 이후 학생·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다다랐다. 학교 수업은 거의 마비된 상태였다. 기순이도 승연이도 독재 타도를 외치며 돌멩이를 들었다. 어지럽고 어두운 세상의 중심에 촛불이 되어 타겠다는 각오였다. 태주는 휴학했고, 희숙은 작년부터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박철규는 오산의 전선대장 노릇을 했다. 박철규는 건대 애학투련 항쟁에서 나흘 정도 조사받고 훈방된 이후 행동이 더욱 산만했다. 주동자가 되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행동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시위를 주동하고 체포되는 ‘동 뜰 수 있는’ 자격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데 박철규는 조직에 충성하기로 작정한 이상 큰 임무를 맡아 산화되길 희망했다. 박철규는 큰 체구에 비해 발은 빠르고 날렵했다. 언제부터인가 검은색으로 착장하고 검은 수건으로 입을 가렸다.
최루탄 연기 속에서 그의 존재는 빛이 났다. 영화에서처럼 뿌연 연기 사이로 재빠르게 나타나 돌멩이를 던지고 다시 연기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은 제법 멋있었다. 그가 던진 돌은 목표물에 정확히 꽂혔다. 돌은 적의 머리면 머리, 가슴이면 가슴, 방패면 방패로 날아갔다. 박철규는 후배들에게 뒤로 도망가며 투석하는 방법과 손목을 이용해 돌을 던지는 방법을 가르쳤다. 손목을 이용할 때는 야구 투수처럼 직구와 변화구를 적절히 사용해야 한다며 비법 전수에 열을 올렸다.
박철규는 서울이나 경기도에서 거센 민주화 바람으로 광주 같은 사태가 일어나길 바라는 것 같았다. 제2의 광주사태가 일어나야 대한민국에서 군부독재가 사라진다고 했다. 그 중심에 박철규 자신이 류동운 아니, 박종철 같은 역할을 해 민주 신화의 주인공이 되길 바랐다. 신념에서 비롯된 죽음이 아니어도 좋았다. 신념이든 우연이든 혼돈의 시대에서는 죽는 사람이 영웅이라 믿었다. 박철규의 믿음은 이것이었다. 영웅은 민중의 가슴속에서 부활한다는.
승연의 귀가가 늦어지고 몸에서 매캐한 냄새가 빠질 날 없자 아버지는 노발대발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 공장이 있는 인천은 노동자들의 시위와 노조 설립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아버지 회사에서 해고된 위장 취업자들이 복직을 요구하는 농성이 매일 회사 앞에서 벌어졌다. 회사 대표 오정일을 악덕 기업주 취급했다. 임시 노조위원장은 회사 내 동지회를 만들어 유인물을 살포하고 파업을 유도했다.
회사 임원진은 강경 대처하자며 노조 설립 주동자는 물론 부역자까지도 해고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오정일은 반대했다. 노조 설립이 불법 아닌 이상 허락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래도 오정일은 노조가 순수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정치적 이슈를 들고 노동 현장을 오염시키고 있다고 판단했다. 노동악법 철폐가 아닌, 군부독재 타도는 노동 이슈가 아니었다. 공장 화장실에서 북괴의 불온 삐라가 발견된 이후 오정일의 노조의 정체성에 대한 판단은 부정적이었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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